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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경(燕京)과 연나라(偃国) ◉ 연경융(燕京戎)최초의 연(燕)은 연경융을 가리킨다. 상나라 말부터 주나라 시기에 활약했던 유목민족이다. 지금의 산서성 흔주시 정락현(静乐县)에서 태원시 첨초평구(尖草坪区) 부근의 분하(汾河) 량안, 산서성 진중시 기현(祁县)의 서쪽, 산서성 진중시 개휴시 소성점촌(邬城店村)의 북쪽까지 모두 연경융이 살던 곳이였다.​​: "태정(太丁, 상나라 28대 왕) 2년에 주(周)나라에서 연경융을 토벌했는데 주나라 군사는 크게 패하였다."​: "분수(汾水)는 연경에서 나온다." 고유(高诱, 동한) 주석: "연경(燕京)은 산 이름이며 태원 분양(汾阳, 산서성 여량시 분양시)에 있으며 물이 거기서 나온다."​: "분수는 무주(武州, 산서성 흔주시 신지현)에 있는 연경산(燕京山, 흔주시 녕무현의 관잠산)에서 나온다.".. 2024. 3. 25.
흉노(匈奴) ◉ 흉노(匈奴) : "흉노는 그 조상이 하후씨(夏后氏)에서 오며 묘예(苗裔)이다. 순유(淳维)라고도 한다. 당(唐), 우(虞) 그 전에는 산융(山戎), 험윤(猃狁), 훈육(荤粥)이 있었고 북만(北蛮)에 거주하였고 가축을 따라 이동하였다." ​ 순유(淳维)는 하나라 왕 걸(桀)의 아들이다. 하나라가 멸망한후 하나라 유민들을 데리고 북쪽으로 도망쳐 들어가 당지의 토착부락들과 융합되였는데 그 후예들을 흉노라고 한다. ​ 산융(山戎)은 상, 주 교체시기에 북방에서 생활한 기마민족이며 승덕(承德), 적봉(赤峰), 조양(朝阳)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산비탈에서 살며 유목과 수렵으로 생활하였기에 "산융"이라고 하였다. 산융은 흉노의 옛 이름이다. ​ 험윤(猃狁)은 흉노의 옛 이름이며 견융(犬戎)이라고도 하며 섬서성, .. 2024. 3. 25.
적적(赤狄), 백적(白狄), 장적(长狄) ◉ 적적(赤狄)적적은 또 "적적(赤翟)"이라고도 적는다. 적적 로국(潞国)은 성이 외(隗)씨이며 염제의 후손이라고 역사에 기록되여있다. 은, 서주 때의 귀방(鬼方)이며 갑골문과 금문에 모두 기록이 있으며 서북쪽의 대국으로서 지금의 섬서, 감숙, 녕하, 내몽골의 오르도스(鄂尔多斯) 일대에서 살았다. 후에 진(晋)나라 사람들과 섞여살았다. 로씨(潞氏,山西省潞城县), 고락씨(皋落氏,山西省垣曲县), 류우씨(留吁氏,山西长治), 탁진씨(铎辰氏,山西长治市), 갑씨(甲氏,河北省曲周县), 장구여씨(廧咎如氏,太原市), 유적씨(有狄氏), 원흘씨(袁纥氏,위그르족), 곡률씨(斛律氏), 해비씨(解批氏), 호골씨(护骨氏), 이기근씨(异奇斤氏), ... ... 등 15개 씨족으로 구성되였다.​: "로(潞), 락(洛), 갑(甲), 여.. 2024. 3. 25.
선우국(鲜虞国), 중산국(中山国),비국(肥国), 고국(鼓国), 구유국(仇犹国) ◉ 선우국(鲜虞国), 비국(肥国), 고국(鼓国)주공(周公)이 제 2차로 상나라를 멸망시키면서 패국(邶国, 안양시)도 역시 멸망하였다. 하지만 지금의 석가장(石家庄) 일대까지는 그 세력이 닿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 곳은 북적(北狄)의 땅이였다. 산서성 오대산(五台山)의 서남쪽에서 발원하여 호타하로 흘러드는 청수하(清水河)란 강이 있는데 옛날에 선우수(鲜虞水)라고 불렀다. 백적(白狄)은 이 선우수 연안에서 발전하였기에 선우족이라 불렀다 대략 서주(西周) 중, 후기부터 석가장 일대에서 번성하여 점차 패국의 땅까지 차지하였다.​이들은 신시(新市, 하북성 석가장시 정정현 신성포촌)를 중심으로 선우국(鲜虞国)을 세웠고 또 고성(藁城, 하북성 석가장시 고성구) 서부에 비국(肥国)을 세웠으며 진주(晋州, 하북성 석가장시.. 2024. 3. 25.
고죽국(孤竹国), 묵태씨(墨胎氏) ◉ 고죽국(孤竹国)"고죽"은 "고죽(觚竹)"으로도 적는데 최초로 은허의 갑골문과 상나라 때의 금문에서 보인다. "고(觚)"는 상, 주 시대의 청동기를 말하고 "죽(竹)"은 기록하는데 사용한 죽간, 옥간, 목간 등을 말한다. 갑골 점괘에서 죽씨(竹氏)들에 연관 된 기록이 40여곳이 존재한다. 하남성 안양시(安阳市), 하북성 당산시 란남현(滦南县), 요녕성 객좌현(喀左县) 등에서 고죽국과 연관있는 갑골문, 청동기, 옥문이 출토되였고 또 , , , 등에도 고죽에 관한 기록이 있다. ​고죽국의 왕은 묵태씨(墨胎氏)이며 또 "묵대씨(墨台氏), "묵이씨(墨夷氏)", "묵이씨(默夷氏)", "목이씨(目夷氏)" 등으로도 적었으며 염제(炎帝)의 후손이다.​: "고죽의 옛 성은 평주 노룡현 남쪽 십이리에 있으며 은나라때 .. 2024. 3. 25.
"朝鲜"이란 한자로 기록된 "조선" ◉조선(朝鲜)조선이 최초로 보인것은 이다. 이 책은 춘추시기의 제(齐)나라 관중(管仲, 기원전 723년~기원전 645년)이 쓴것이다. 그 때의 조선은 지금의 요녕성과 하북성이 맞닿은 지경에 있었다. 에도: "조선은 북해의 모퉁이에 있다."라고 하였는데 북해는 지금의 발해이다. : "조선성은 부의 경내에 있다. 전하는데 의하면 기자가 봉 받은 곳이다." 명나라때의 영평부(永平府)가 다스리던 곳은 하북성 노룡현(卢龙县)으로 조선성은 가능하게 란하(滦河) 서안에 있었다고 보여진다.[n-댜-조선]​1세기 중엽에 이르러 고조선(위만조선)은 한나라에 의해 멸망하고 조선이란 이름은 사서에서 사라진다. ​명나라 홍무(명태조 주원장, 1328년~1398년)년간에 이르러 이성계가 고려를 멸망시키고 이씨 왕조를 세운후 명나.. 2024. 3. 25.
기자와 기씨조선(箕氏朝鲜) ◉ 주나라가 봉한 국가 및 기씨조선(箕氏朝鲜)주무왕이 제후들을 봉하면서 역시 주(纣)의 아들 무경(武庚)을 은(殷, 하남성 안양시)에 봉하여 조상의 제사를 올리게 하였다. 무경은 상나라 마지막 왕 주의 아들로 무경으로 남아있는 은나라 백성들을 다스리게 하였다.​하지만 무경이 반란을 꾀할까봐 조가(朝歌, 은의 수도)의 주위에 패(邶, 한단), 용(鄘, 하남성 신향시), 위(卫, 하남성 학벽시 기현) 등 세 나라를 두었다. 북쪽에 패나라를 두어 곽숙(霍叔, 주무왕 동생)을 봉하였고 서쪽과 남쪽에 용나라를 두어 채숙(蔡叔, 주무왕 동생)을 봉하였으며 동쪽에 위나라를 두어 관숙(管叔, 주무왕 동생)을 봉하여 무경을 감시하게 하였다.[n-냐-주 봉국]​은이 멸망한지 제 4년, 무왕이 죽고 아들 성왕(成王)이 어려.. 2024. 3. 25.
상 주진(主辰)-은상(殷商) ◉ 상(商), 주진(主辰)알백과 실심은 광림속에 같이 거주하였는데 두 형제 사이가 좋지않아 아버지 제 곡이 알백은 상구로 보내고 실심은 대하로 보내여 두 형제를 따로 살게하였다. 알백을 상구(商丘)로 보냈는데 주진(主辰)이라 하였다. ​​◉ 상탕(商汤): "계(契)현왕이 소명(昭明)을 낳았는데 지석(砥石)에서 살다가 상(商)으로 옮기였다. 십사대에 천을(天乙) 성탕(成汤)이 있었다."​상탕은 성이 자(子)씨이고 이름은 리(履)이다. 무탕(武汤), 천을, 성탕이라고도 부르며 계(契, 알백)의 14대 손이다. 주계(主癸)의 아들이며 상왕조를 세운 인물이다.​갑골문에 "성(成)" 혹은 "당(唐)"으로 기록되였고 또 "대을(大乙)", "천을", "조을(祖乙)"이라고도 기록하였다. 갑골문에는 "탕(汤)"자가 없고.. 2024. 3.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