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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조선-상나라/기자와 기씨조선

기자와 기씨조선(箕氏朝鲜)

by 성수록 2024. 3. 25.

◉ 주나라가 봉한 국가 및 기씨조선(箕氏朝鲜)

주무왕이 제후들을 봉하면서 역시 주(纣)의 아들 무경(武庚)을 은(殷, 하남성 안양시<安阳市>)에 봉하여 조상의 제사를 올리게 하였다. 무경은 상나라 마지막 왕 주의 아들로 무경으로 남아있는 은나라 백성들을 다스리게 하였다.

하지만 무경이 반란을 꾀할까봐 조가(朝歌, 은의 수도)의 주위에 패(邶, 한단), 용(鄘, 하남성 신향시<新乡市>), 위(卫, 하남성 학벽시 기현<淇县>) 등 세 나라를 두었다. 북쪽에 패나라를 두어 곽숙(霍叔, 주무왕 동생)을 봉하였고 서쪽과 남쪽에 용나라를 두어 채숙(蔡叔, 주무왕 동생)을 봉하였으며 동쪽에 위나라를 두어 관숙(管叔, 주무왕 동생)을 봉하여 무경을 감시하게 하였다.

[n-냐-주 봉국]

은이 멸망한지 제 4년, 무왕이 죽고 아들 성왕(成王)이 어려 무왕의 동생 주공(周公) 단(旦)이 대신 국사를 보게 되였다. 이에 불만을 느낀 관숙과 채숙이 요언을 퍼뜨리고 무경과 연합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주공이 성왕의 명을 받고 조가를 정벌하여 반란을 평정하고 무경을 죽이였다. 또 관숙을 죽이고 채숙을 쫓아내고 곽숙의 급을 낮추었다.

무경의 난을 평정한 후 주공과 성왕은 다시 제후를 봉하는데 71개 제후국 중 53개가 문왕, 무왕, 주공의 후손이였다고 한다. 은의 땅에는 위(卫)나라를 세우고 주공의 동생 강숙(康叔)을 봉하여 상나라의 유민들을 다스리게 하였는데 후에 진(秦)나라에 합병되였다. 또 주나라에 투항했던 주(纣)의 서형 미자(微子) 계(启)를 상나라 옛 수도 상구(商丘)에 봉하여 나라를 세우게 하고 국호를 송(宋)이라 하였는데 전국시기 제나라에 의해 멸망하였다.

그리고 상나라가 멸망하자 은상의 왕족이였던 기자(箕子)가 주나라를 섬기기 싫어 부분의 유민을 데리고 북으로 옮기여 조선(朝鲜)을 세우는데 이것을 기씨조선이라고 한다. 서한 초기 연왕 로관의 부장 위만(卫满)에 의해 기씨조선은 멸망하였다. 전하는데 의하면 조선반도(한반도)에 있던 진국(辰国)이 기자의 나라라고 한다.

◉ 기자의 행적과 후예

기자는 성이 자(子)씨이고 이름은 서여(胥余)이다. 은나라 사람으로 상왕 문정(文丁)의 아들이고 상왕 제을(帝乙)의 동생이며 상왕 제신(帝辛, 주왕)의 숙부이다. 태사직을 지냈으며 기(箕)에 봉하여졌다. 상, 주 정권이 교체되는 시기에 상나라를 떠나 조선으로 갔다. 기자가 조선에 봉하여 진 후에 기(箕) , 조선(朝鲜), 선우(鲜虞), 선(鲜) 등 성씨가 생기였다.

<통지·씨족략>: "기씨는 성이 자(子)씨이고 기자의 나라이다. 상 도읍 근처의 제후국이다.

두예(서진)가 말하길: "태원의 양읍현 남쪽에 기읍(箕邑, 산서성 진중시 태곡구 백연촌<白燕村>)이 있다. 수나라 때에 태곡(太谷)으로 고치였고 지금은 태원에 속하였다. 무왕이 상을 멸망시키고 기자를 조선으로 고쳐 봉하였다. 지금은 진읍이다."

<연사기사편년회안>(1995년): "태곡의 기읍은 춘추시기에 진나라가 기씨들을 봉하며 생긴것으로 여겨진다. 주나라 때의 기자의 나라는 지금의 배이징시 즉 계성(蓟城, 베이징시)이다. 기(箕)와 계(蓟)는 옛날 음이 같았고 베이징의 로구교(卢沟桥), 방산 유리하(琉璃河), 창평 백부촌(白浮村) 등에서 출토된 동기에 기나라에 관한것들이 새겨져 있었고 하북성 천안현 하관영진 마초촌 소산자 상나라 유적에서 출토된 동정, 동궤 내부 바닥에도 "기(箕, 其)"자가 새겨져 있었다. 윗 내용으로 보면 상나라 말에 기자를 봉하였던 곳에 주나라가 다시 기자를 봉한것으로 보인다.

<한서·지리지>: "은이 쇠약해지니 기자가 조선으로 가 그 백성한테 예절을 가르치고 누에를 치고 비단을 짜게 하였다."

<후한서·동이열전>: "옛날 기자가 은나라의 운이 다하자 조선으로 피해 가 그 나라의 풍속을 시작하였다하니 알바가 없다. "

<고금도서집성·씨족총부회고>: "주(周)가 기자를 조선에 봉한 후 선씨, 조선씨, 선우씨가 생겼다."

기자산(棋子山)

주나라의 공격으로 상나라가 멸망하고 정권이 교체되는 혼난한 틈을 타 기자는 기산(箕山)으로 도망쳐 들어가 은거하였다.

기자산은 산서성 진성시 릉천현 육천향(六泉乡) 서남쪽에 있다. 전하는데 의하면 은상의 왕족인 기자가 살던 곳이라고 한다. 주무왕이 상을 멸망한후 기자가 여기에 피하여 살았는데 자갈을 벌여놓고 천문을 예측했다고 한다. 현재 기자산은 세계 바둑의 기원지로 되였고 바둑문화와 경기의 활동중심이 되였다.

기자릉

1102년, 고려 숙종이 례부의 건의를 받아들여 기자가 묻혀있는 곳을 수소문하여 목단봉(牡丹峰) 자락임을 알아낸후 릉묘를 세우고 그 옆에 기자 묘당을 세우고 제사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수경주>에: "량국 몽현 북쪽의 박벌성(薄伐城, 산동성 하택시 조현<曹县>) 중에 성탕(成汤)무덤이 있는데 그 서쪽에 기자무덤이 있다."라고 적혀있는데 이로 보면 평양의 기자릉은 기자 자신이 묻혀있는것이 아니라 기자의 의관묘거나 기자의 후손 관련 묘이다. 조선의 역대 왕들은 기자릉에서 제사를 지냈고 몇번의 수리를 거쳤다. 1959년 봄에 목단봉 천년공원을 건설하며 김일성의 명령으로 기자릉은 해체되였다.

<사천랑중어양군선우씨대성종보>: "결(洯, 계<契>)이 우(禹)를 보좌해 치수한 공이 있어 상에 봉하여져 십사대를 전하여 탕(汤)을 낳았는데 하나라를 정벌하고 걸(桀)을 쫓아내고 천자의 자리에 올라 그 무공으로 이름하여 성탕(成汤)이라 하였다. 또 십삼대를 전하여 기자를 낳았는데 이름은 서여(胥余)이고 ... ... ...무왕이 은을 멸망하고 기자를 조선에 봉하였다. 기자는 기산(箕山), 기은(箕殷) 두 아들을 낳았는데 선우국(鲜虞国, 후에 중산국<中山国>으로 됨)으로 이주하여 살게 되였다. 이들이 여기에 봉하여졌기에 나라이름을 성씨로 하였다. 선우신(申)을 낳았는데 바로 (선우씨<鲜于氏>) 시조이다."

<선우황비>: "선우는 기자의 후손으로 묘예(苗裔)이다." 또 "석산이 있는데 선우(鲜于)지수가 흘러나와 남으로 호타(滹沱)에 흘러든다. 비수(肥水)는 바로 비국(肥国)의 주거지이고 선우(鲜于)는 곧 선우(鲜虞国, 하북성 석가장시 정정현<正定县>)이다. 선우는 선우수(鲜于水, 흔주시 오대현 청수하<清水河>)때문에 지어진 이름이다." "그 후대들을 선우씨라고 하였다."

나중에 기은(箕殷)이 아들을 낳아 이름을 신(申)이라 하였다. 신은 선여(鲜舆, 옛어양<渔阳>, 베이징시 밀운구 십리보진 통군장촌<统军庄村>)에 봉하여졌고 그 지명을 성씨로 하여 선여신이라 하였는데 여전히 선우신(鲜虞), 선우신(鲜于申)이라고도 불렀다. 후에 그 음을 통일하여 모두 선우씨(鲜于氏)라고 하였다.

[n-너-기자와 후손]

 

◉ 두로영은묘비(豆卢永恩墓碑), 미자조선(微子朝鲜)

두로영은(506년~563년), 창려 도하(徒何, 요녕성 금주시<锦州市>) 사람으로 선비족이다. 북위에서 북주에 이르는 시대의 대신이며 초국공 두로녕의 동생이다."

두로영은묘비: " 군은 은이라하며 자는 영은이고 창려도하인이다. 본래 성씨는 모용(慕容)이며 연 문명제(文明帝) 황(皝)의 후예이다. 조선에 미자(微子, 기자를 오기한듯 하다.)를 봉하였는데 고죽(孤竹) 백이(伯夷)의 나라이다. 한나라 때에는 네개의 성이 있었고 진나라 때에는 제후 하나를 두었다. ... ... ...

내위명왈: "조선이 건국하니 고죽에서 왕이 되였다. 땅은 고류(高柳, 산서성 대동시 양고현<阳高县>)라 부르고 산은 밀운(密云, 베이징시 밀운구<密云区>)이라 하였다. 요양에서 조(赵)가 쪼개지고 무수(武遂)는 진(秦)이 나누었다. ... ... ...

[n-녀-두로영은비]

◉ 부왕(否王)

부왕(기원전 3세기) 또는 비왕(丕王, 생몰년 미상, 재위: 기원전 232년~기원전 208년)은 고조선의 왕이다. 《삼국지》의 기록에 따르면, 기원전 214년, 시황제가 몽염을 시켜 만리장성을 쌓게 하여 요동에까지 이르자 진나라가 쳐들어 올 것을 두려워해 진나라에 복속하였다고 한다.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부왕은 죽고 아들 준왕(準王)이 즉위하였다.

청주 한씨 족보에 따르면 부왕(否王)의 부왕(父王)은 장평왕(章平王), 조부는 조선왕 3세에 대응하는 현문왕(顯文王)이라고 하며, 부왕(否王)의 시호는 종통왕(宗統王)이라 하나 21세기 기준 이 기록들은 조작되었을 가능성이 있어 인정되지 않는다.

◉ 준왕, 기자조선의 멸망

준왕(準王, 재위: 기원전 3세기 초 ~ 기원전 194년)는 고조선과 한(韓)의 왕이다.휘(諱)는 준(準)이다. 《삼국지》에는 준왕을 기자의 40여세손이라 기록하고 있다. 조선 시대에는 준왕을 기자의 후손으로 인정하여 기준(箕準)이라 칭하고 있으나 이는 기자조선(箕子朝鮮) 문제와 함께 많은 논란의 대상이다.

진시황(秦始皇)이 중국을 통일했을 무렵에 즉위하였다. 진(秦)·한(漢) 교체기에 망명해오는 유민들을 받아들였으며, 기원전 195년 망명해 온 위만을 박사(博士)로 삼고 서쪽 변방을 지키게 하였다. 기원전 194년 위만이 전란을 피해 망명한 제나라와 연나라 유민들을 끌어모아 모반을 일으키자 준왕은 측근을 데리고 남쪽으로 피신했다.준왕은 한(韓)의 땅으로 들어가 한왕(韓王)을 자칭했으며, 조선과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 이후의 생애는 알려진 것이 없다.

《후한서》의 주석에는, 준왕이 마한의 왕을 쳐부수고 한왕이 되어 삼한을 지배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 시대에는 기자가 이주한 땅을 금마군(金馬郡, 현재의 익산)으로 보았으며, 익산의 무강왕릉(武康王陵)을 기자의 능이라 하였다.

《동국문헌비고》에 따르면, 기자(箕子)의 40세손이며 기자조선의 마지막 왕인 준왕이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뱃길로 남쪽으로 옮겨 진(辰)나라 북쪽 변방인 지금의 경기도 이천 땅인 서아성(徐阿城) 지방에 자리를 잡음으로써 지명을 따 성씨를 서씨(徐氏)라 하였다고 한다.

<삼국유사>: "위만이 조선을 진공하자 조선왕 준은 궁인들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남으로 한(韩)땅에 도착하여 나라를 세우고 마한(马韩)이라 하였다."

조선 고적들인 <기자본기>, <동사강목>, <대동운옥>, <월정만필> 등에서 기준이 남하하여 세운 정권을 "마한"이라 하였다. 이로보아 중국사서에 기록되여 있는 기준을 "한왕(韩王)"이라고 한것도 "마한왕"을 간략하여 적은것으로 보인다.

<위서·동이전>: "좌우의 궁인들을 데리고 바다로 들어가 한의 땅에 거주하며 스스로 한왕이라고 하였다."

<후한서>: "한(韩)은 세종류가 있는데 첫째는 마한, 둘째는 진한(辰韩), 셋째는 변한(弁韩)이다. 마한은 서쪽에 있으며 오십사개국이고 그 북쪽은 낙랑, 남쪽은 왜와 접하여 있다. 진한은 동쪽에 있으며 십이개국이고 예맥과 접하여 있다. 변한은 진한의 남쪽에 있으며 역시 십이개국이고 그 남쪽 역시 왜에 접하여 있다. 모두 칠십팔개국이고 큰것은 만여호 작은것은 수천호이며 산과 바다사이에 있고 사방이 사천여리이고 동, 서는 바다이고 모두 옛 진국(辰国)이였다. 마한이 제일 크고 그곳 사람으로 진왕을 세웠으며 목지국(目支国)에 도읍하였고 삼한땅을 다스렸다. 그 곳의 뭇 나라왕들은 원래 모두 마한의 사람들이였다. 나라마다 한사람이 천신을 제사지내였는데 "천군(天君)"이라 불렀다. 또 소도(苏涂)를 세웠다.

<위지>: "뭇 나라들마다 별읍을 두고 소도로 하였는데 그 곳으로 도망쳐 들어가면 찾아오지 못하였다. 소도의 뜻은 부도(浮屠)와 비슷하였는데(참고: 황제때의 추도<邹屠>) 큰 나무를 세우고 방울과 북을 달았으며 귀신을 섬기였다. 처음에 조선왕 준이 위만의 공격을 받아 그 좌우 궁인들을 데리고 바다로 들어가 마한을 공격해 파하고 스스로 한(韩)왕이 되였다. (<위략>: "나라에 남았던 그 아들과 친척들은 이로하여 성을 한(韩)씨로 고치였다. 준왕은 바다 가운데 있으며 다시는 조선과 왕래하지 않았다.) 그 후손들은 모두 사라지고 지금의 한(韩)나라 사람들속에 여전히 그를 모셔 제사지내는 사람이 있다. 준이 멸망하자 마한 사람들은 다시 스스로 진왕(辰王)을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