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죽국(孤竹国)
"고죽"은 "고죽(觚竹)"으로도 적는데 최초로 은허의 갑골문과 상나라 때의 금문에서 보인다. "고(觚)"는 상, 주 시대의 청동기를 말하고 "죽(竹)"은 기록하는데 사용한 죽간, 옥간, 목간 등을 말한다. 갑골 점괘에서 죽씨(竹氏)들에 연관 된 기록이 40여곳이 존재한다. 하남성 안양시(安阳市), 하북성 당산시 란남현(滦南县), 요녕성 객좌현(喀左县) 등에서 고죽국과 연관있는 갑골문, 청동기, 옥문이 출토되였고 또 <국어>, <관자>, <한비자>, <사기> 등에도 고죽에 관한 기록이 있다.
고죽국의 왕은 묵태씨(墨胎氏)이며 또 "묵대씨(墨台氏), "묵이씨(墨夷氏)", "묵이씨(默夷氏)", "목이씨(目夷氏)" 등으로도 적었으며 염제(炎帝)의 후손이다.
<괄지지>: "고죽의 옛 성은 평주 노룡현 남쪽 십이리에 있으며 은나라때 제후인 고죽국이다. 성은 묵태씨이다."
<로사>: "우(禹)가 천하를 다스릴때 이(怡)를 소렬산(绍烈山)에 봉하였고 묵대라 하였다." 또"우가 봉한 염제의 후예 강(姜)씨성의 우대(于台, 於台)가 바로 묵대이다. 성탕(成汤) 원년 정월 삼일 병연(丙寅)에 쪼개여 고죽에 봉하였다."
<고금도서집성·명론회편관상전훈작부지2>: "하나라 왕 우가 이를 소렬산(绍列山)에 봉하였다. "로사"에 따르면 이는 강씨의 나라이다. 우가 천하를 가지자 이를 소렬산에 봉하였는데 묵대이다. 성탕이 처음으로 리지(离支, 离枝, 令支. 하북성 당산시 천안시<迁安市>)를 나누어 고죽으로 하였다."
[n-랴-고죽]

◉ 유태씨(有邰氏)와 이(怡)
유태씨는 염제 신농씨 후예의 한갈래이다. 제 리(帝厘)는 성이 강씨이고 이름은 유흘(羭纥)이며 신농씨의 7대손이다. 염제 리가 태정(邰亭, 섬서성 함양시 양릉구 이대향<李台乡>)에 처음으로 거주하기 시작하였는데 여기서 제 거(居, 来)를 낳고 강씨 성을 가진 유태씨를 세우며 이렇게 유태씨가 시작되였다. 후에 분수 하류의 태원(太原, 옛 태원은 산서성 운성시 문희현 직완산<稷王山> 남측 문희현<闻喜县> 일대에 있었다.) 일대로 이주하여 살았는데 대태(台骀)로 불렸고 바로 태국(骀国,邰国)이다. 이들이 나뉘여 열세개 국을 이루는데 이(伊), 렬(列), 주(舟), 락(骆), 순우(淳于), 희(戏), 이(怡), 향(向), 주(州), 박(薄), 감(甘), 수(隋), 기(纪)이다. 우 때에 이(怡)를 소렬산(绍烈山,호북성 수주<随州>)에 봉하는데 묵대(默台)라 하였다.
[n-러-유태씨,묵태씨]

◉ 묵태씨(墨胎氏)
전하는데 의하면 순(舜)이 재위시에 홍수가 심하여 곤(鲧, 사희<姒熙>)에게 치수를 맡기였다. 곤이 치수를 제대로 하지 못하여 그 피해가 심하여 순은 곤을 처형하고 그 아들 우(禹, 사문명<姒文命>)에게 맡겨 치수하게 하였다. 우는 그 책임이 중함을 느껴 염제 신농씨의 후예인 강묵여(姜墨如)란 사람을 찾아가 치수의 방법을 가르침 받았다. 13년을 치수하여 드디여 홍수를 다스리였는데 우는 이로하여 묵여를 스승으로 모시였다. 강묵여의 아들 강태초(姜胎初)가 아버지의 이름을 성씨로 하여 묵태초(墨胎初)라 불렀는데 이 후로 전해내려오며 묵태씨(墨胎氏)로 되였다.
◉ 백이(伯夷), 숙제(叔齐)
상나라 말기의 고죽국의 두 왕자이다. 전하는데 의하면 고죽국의 왕이 유언으로 셋째 아들 숙제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하였다. 그러나 왕이 죽자 숙제는 왕위를 백이한테 양보하였고 백이가 거절하자 숙제가 천론을 거스르지 않으려고 역시 왕위를 계승하지 않았다. 두 형제는 선, 후로 나라를 떠나 주나라에 머물렀는데 주무왕이 상나라를 토벌하자 극히 말리였다. 상나라가 멸망하자 그들은 주나라의 쌀을 먹는것이 수치스러워 고사리를 캐여먹다가 수양산(首阳山, 낙양시 언사시<偃师市>)에서 굶어죽었다.
기원전 664년 제환공(齐桓公)이 연(燕)나라를 구하기 위해 출병하여 산융(山戎)을 정벌할때 고죽국과 그 인접국 령지국(令支国, 하북성 천안<迁安>, 천서<迁西>, 란현<滦县> 일대)을 쳐서 멸망시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