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천독, 신독, 인도
<산해경·해내경>: "동해의 안에 북해의 모퉁이에 나라가 있는데 조선(朝鲜), 천독(天毒)이라 부른다. 그 사람들은 물에 거주하며 사람사이가 친숙하며 아낀다."
곽박(郭璞, 276년-324년)이 말하길: "천독은 곧 천축국(天竺国)이다." 불교가 이 나라에서 기원하였으며 즉 지금의 "인도(印度)"를 말한다. 인도는 먼 남쪽, 조선은 반대의 먼 북쪽에 있는데 산해경에는 같은 곳에 기록되여있다. 때문에 왕숭경(王崇庆, 1484년-1565년)은: "천독은 다른 뜻을 갖고 있는것으로 보인다. 곽박이 천축국이라 하였는데 천축은 서역에 있고 한명제(汉明帝)가 사신을 보내 부처의 뼈를 맞이한 땅이다. 때문에 이것에 대해 알지 못하며 아닌것으로 보인다."
인도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서한(기원전 202년~8년) 때의 <사기>이다. <사기·대완열전>: "한무제때에 장건이 대하(大夏)에 있었는데 대하인이 말하길 '우리의 상인이 신독(身毒)의 시장에 다녀온다. 신독은 대하의 동남쪽에 있는데 수천리이다. 본토인들의 민속은 대체로 대하와 같다. 날씨가 습하고 뜨겁다. 그 백성은 코끼리를 타고 싸우며 그 나라는 큰물과 닿아있다."
<후한서·서역전>: "천축국은 또 신독이라 부르며 월씨(月氏)의 동남쪽 수천리에 있다."
<대당서역기>: "천축이라는 이름에 대해 여러가지 분쟁이 있는데 이전에 신독 또는 현두(贤豆)라고 불렀지만 오늘 정확한 발음으로 인도(印度)라고 부름이 마땅하다."

◉축(竺)씨성의 유래
1. 죽(竹)씨 성에서 나왔다. 옛날 고죽국(孤竹国)이 있었는데 춘추시대에 이르러 그 나라 왕의 아들인 백이, 숙제의 후예가 나라 이름을 성씨로 하였는데 바로 "죽씨(竹氏)"이다. 한나라때에 이르러 종양(枞阳)인 죽안(竹晏)이 원수진 사람을 피하기 위해 "축씨(竺姓)"로 고쳤고 그 후세에 이어졌다.
2. 옛 인도에서 나왔다. 옛 인도를 천축국이라 불렀는데 천축의 승려가 중국에 와 교를 전파하면서 "축(竺)"을 성으로 하였다. 후에 일부 승려들이 그 인도승려의 가르침을 받으며 스승의 성을 따라 성을 "축"으로 하였다.
◉현도씨(玄都氏)
<일주서·사기>: "이전에 현도가 있었는데 귀도(鬼道)를 좋아하고 사람이 아닌 하늘에 일을 맡기며 책략 있는 신하를 쓰지 않고 거북껍데기로 점을 치고 신과 무당으로 나라를 운영하니 선비들이 모두 떠나고 현도는 그리하여 망하였다."
<죽서기년>: "(제순,帝舜) 사십이년에 현도씨가 내조하여 보옥을 바치였다."
◉현도단(玄都坛)
1. 김선관(金仙观) 현도단. 김선관은 "자오금선관(子午金仙观)" 이라고도 하며 도교 전진파(全真派)의 도관이며 한국 도교의 조정(祖庭)이다. 섬서성 서안시 장안구 종남산(终南山) 자오진 서측의 자오곡내에 위치하고 있다. 9세기 중엽에 신라인 김가기(金可记)가 장안에 유학을 와 진사에 급제하였는데 그것을 버리고 자오곡내에 은거하며 수도하였다. 도교의 선조(仙祖) 종리권(钟离权)의 내단술(内丹术)을 전수받았으며 한국에 도교를 전파한 첫 사람이다.
2. 용호산(龙虎山) 현도단. 강서성 응담시 귀계시(贵溪市) 용호산위에 있다. 위진(魏晋)시기에 장도릉(张道陵)의 제 4대 손 장성자(张盛自)가 한중(汉中)에서 용호산으로 옮겨와 천사(天师, 장도릉을 말함)가 은거하던 초당에 향을 피우는 단을 세웠는데 후에 황페해지다가 명청시기에 주요 건축물에 현단사(玄坛祠)와 현단전(玄坛殿)이란 이름을 붙히였다. 민국(民国)년간에 모두 타버리고 현재 유적지로 남아있다.
3. 구천사(寇天师) 현도단. 북위(北魏)의 태무제(太武帝)가 수도 평성(平城, 산서성 대동시)에 천사(天师) 구겸지(寇谦之)를 위해 세운 현도단이다. 시광(始光)원년(424년)에 시작하였으나 무정(武定) 6년(549년)에 페지되였으며 그 사이 3번 옮기였다.
[e-쟈-현도단]
◉현주(玄洲)
<십주기>: "현주는 북해의 가운데 있는데 술해(戌亥, 서북쪽)의 땅이다. 사방이 칠천이백리이며 남쪽안까지는 삼십륙만리이다. 위에 태현도(太玄都)가 있으며 신선 백진공(伯真公)이 다스린다. 언덕과 산이 많다. 바람부는 산이 많은데 그 소리가 우뢰소리 같다."
◉현토(玄菟)
한사군(汉四郡)의 하나로 현토군이라 한다. 전쟁과 정권의 바뀜으로 강역에는 변화가 있었다. 한무제 원봉 삼년(기원전 108년), 최초로 조선반도(朝鲜半岛) 함경남도 부조성(夫租城, 옥저성<沃沮城>)에 설치되였고 개마고원을 중심으로 그 주변의 평원과 함경남, 북도, 중국 요녕성 동부, 길림성 동부, 흑룡강성 남부 일대를 관할하였다. 기원전 82년, 진번, 임둔 두군이 철수되고 진번이 현도군에 속한다. 2년, 길림성 집안(集安)으로 옮겼다가 32년, 무순시 신빈(新宾)으로 옮겼으며 107년 무순시 노동공원 고성유적(古城遗址)으로 옮겼다가 121년 심양시 상백궁(上伯官) 고성유적으로 옮겼다.
◉험독(险渎)
왕검성(王儉城), 또는 왕험성(王險城)이라고도 한다. 고조선의 후기 수도로 기원전 108년에 위만조선의 우거왕 때 전한 무제의 공격을 받아 왕검성이 함락되어 고조선은 멸망하였다.
응소(동한): "조선왕 만(滿)의 수도이다. 험한 물가에 자리 잡아 험독(險瀆)이라 하였다."
신찬(서진): "왕험성(王險城)은 낙랑군 패수의 동쪽에 있는데 이곳이 자연히 험독이다."
1. 현재 요녕성 안산시 대안현(台安县) 동남쪽 11키로에 있는 신개하진(新开河镇) 경내에 있다. 이 험독현은 현재 대부분이 인정하는 험독현이다.
2.<요동지>: "험독현은 요녕성 심양시 소가툰구 봉집보(奉集堡)이다. 옛 봉집현은 지금 요양성(辽阳城) 동북 80리에 있었으며 한(汉)나라때에 험독현이라 불렀으며 고려에서는 쌍엄현(双俨县), 금나라에서 봉집현이라 불렀는데 명나라 때에 현을 없애고 보로 하였다.
3.조선반도내에 있는 대동강반의 평양시이다.
[e-저-험독]
◉ 단군의 이름 왕검
왕검(王儉)이란 글자가 최초로 등장한 곳은 《삼국사기》이다.
원문: "平壤者本仙人王儉之宅也 或云王之都王險"
번역문: "평양은 본래 선인(仙人) 왕검(王儉)의 터이다. 또는 왕의 도읍 왕험(王險)이다.”
고조선의 수도는 아사달 이외에도 평양성, 왕검성, 검독, 험독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검(儉)"이 "검을 검(검을 玄)"에서 왔다면 응당 한자로 "현(玄)"이 맞으며 "험(險xian)"도 "현(玄xuan)"과 음이 근접하므로 바꿔 쓸수가 있었다. 때문에 검독(儉瀆)과 험독(險瀆)은 사실 현도(玄都,險都)에서 유래했다고 볼수있고 왕검(王儉), 왕험(王險)도 왕현(王玄)을 발음이 비슷한 다른 글자로 바꾸어 쓴것뿐이다.
여기서“현(玄)"은 황제 "현운(玄云, 환인, 헌원, 천원)"과 그의 아들 "현효(玄嚣, 소호금천)"의 "현"에서 오며 고대에 그들과 그 후손들의 나라가 항상 현재 중국 대륙의 북쪽에 위치했던 연고로 북쪽을 대표하는 글자로도 되였다. 현도가 서쪽으로 중앙아시아를 거쳐 지금의 인도 땅에 정착하면서 불렸던 신독, 천축, 현두, 힌두, 인도 등 명칭으로 보면 사실 북쪽이란 방위와 상관 없는 글자였음을 알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