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라의 건국신화
<삼국사기>권 1 신라 본기 박혁거세
(가)시조는 성이 박(朴)씨이고 이름은 혁거세(赫居世)이다. 전한(前漢) 효선제(孝宣帝) 오봉(五鳳) 원년 갑자(기원전 57년) 4월 병진(또는 정월 15일)에 즉위하여 거서간(居西干)이라 일컬었다. 이때 나이가 13세였고 나라 이름을 서나벌(徐那伐)이라 하였다.
(나) 이에 앞서 조선(朝鮮)의 유민들이 산골짜기 사이에 나뉘어 살며 6촌을 이루고 있었다. 첫째는 알천(閼川) 양산촌(楊山村)이고, 둘째는 돌산(突山) 고허촌(高墟村), 셋째는 취산(觜山) 진지촌(珍支村, 또는 간진촌<干珍村>), 넷째는 무산(茂山) 대수촌(大樹村), 다섯째는 금산(金山) 가리촌(加利村), 여섯째는 명활산(明活山) 고야촌(高耶村)인데, 이것이 진한(辰韓) 6부(六部)가 되었다.
(다) 고허촌의 우두머리 소벌공(蘇伐公)이 양산 기슭을 바라보니 나정(蘿井) 옆의 숲 사이에서 말이 무릎을 꿇고 앉아 울고 있으므로, 가서 보니 문득 말은 보이지 않고 다만 큰 알만 있었다. 그것을 쪼개니 어린아이가 나왔으므로 거두어서 길렀다. 나이가 10여 세에 이르자 남달리 뛰어나고 숙성하였다. 6부 사람들은 그 출생이 신비하고 기이하였으므로 그를 받들어 존경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그를 임금으로 삼았다. 진한 사람들(辰人)은 "박(瓠)"을 "박(朴)"이라 일컬었는데 처음에 큰 알이 마치 박과 같았던 까닭에 박(朴)을 성으로 삼았다. 거서간은 진한의 말로 왕 혹은 존귀한 사람을 뜻한다.
<삼국유사>신라 시조 혁거세왕
(가) 진한 땅에는 옛날 여섯 마을[六村]이 있었다. 하나는 알천 양산촌(閼川 楊山村)이니, 촌장 알평(謁平)이다. 처음에 표암봉(瓢嵓峰)에 내려왔으니, 이가 급량부(及梁部) 이씨의 조상이 되었다. 둘째는 돌산 고허촌(突山 高墟村)이니, 촌장은 소벌도리(蘇伐都利)이다. 처음에 형산(兄山)에 내려왔으니 이가 사량부 정씨의 조상이 되었다. 셋째는 무산 대수촌(茂山 大樹村)이니, 촌장은 구례마(俱禮馬)이다. 처음에 이산(伊山)에 내려왔으니 이가 점량부(漸梁部) 또는 모량부(牟梁部) 손씨의 조상이 되었다. 넷째는 취산(觜山) 진지촌(珍支村)이니, 촌장은 지백호(智伯虎)이다. 처음 화산(花山)에 내려왔으며, 본피부(本彼部) 최씨의 조상이 되었다. 다섯째는 금산 가리촌(金山 加里村)이니 촌장은 지타(祗沱)이다. 처음에 명활산(明活山)에 내려왔으며, 한기부(漢歧部) 또는 한기부(韓歧部) 배(裵)씨의 조상이 되었다. 여섯째는 명활산 고야촌(明活山 高耶村)이니, 촌장은 호진(虎珍)이라 하고, 처음에 금강산에 내려왔으며, 습비부(習比部) 설(薛)씨의 조상이 되었다.
(나) 전한 지절(地節) 원년(69년) 임자(壬子) 3월 초하룻날에 6부의 조상들이 각각 자제들을 데리고 다 함께 알천(閼川) 언덕 위에 모여 의논하기를 “우리들이 위로 임금이 없어 백성들을 다스리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백성들이 모두 방종하여 제멋대로 놀고 있으니 어찌 덕이 있는 사람을 찾아서 임금으로 모시고 나라를 창건하고 도읍을 정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이에 모두 높은 데 올라가 남쪽을 바라보니 양산(楊山) 아래 나정(蘿井)이라는 우물 가에 이상한 기운이 번개빛처럼 땅에 드리우고 있었다. 거기에는 흰 말 한 마리가 무릎을 꿇고 절하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잠시 뒤에 그곳을 살펴보니 붉은 알 한 개가 있고 말은 사람을 보자 길게 울더니 하늘로 올라갔다. 그 알을 깨고 어린 남자아이를 얻었는데, 모양이 단정하고 아름다웠다. 모두 놀라고 이상히 여겨 아이를 동천(東泉)에서 목욕을 시키니, 몸에서 광채가 나고 새와 짐승들이 따라서 춤을 추었다. 이윽고 천지가 진동하고 해와 달이 맑게 빛났다. 이에 혁거세왕(赫居世王)이라 이름 지었다. 그리고 왕의 칭호를 거슬한(居瑟邯)이라하였다.
(다) 이때 사람들이 다투어 축하하며 말하기를 “이제 하늘의 아들이 이 땅에 내려왔으니 마땅히 덕이 있는 여자를 찾아 배필을 삼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이날 사량리(沙梁里)에 있는 알영정(閼英井)에서 계룡이 나타나서 왼쪽 옆구리로부터 어린 여자아이를 낳았다. 그 아이는 얼굴과 모습이 매우 아름다웠으나, 입이 닭의 부리와 같았다. 이에 월성(月城)의 북쪽 냇가에 가서 목욕을 시켰더니 그 부리가 빠졌다. 그래서 그 내 이름을 발천(撥川)이라 하였다.
(라) 궁실(宮室)을 남산 서쪽에 짓고는 두 명의 신성한 아이를 모셔다 길렀다. 사내아이는 알에서 나왔는데, 알은 박과 같이 생겼다. 사람들은 박을 박(朴)이라 하므로 성을 박(朴)으로 삼았다. 계집아이는 태어난 우물 이름으로 이름을 지었다. 두 성인의 나이가 열세 살이 된 오봉(五鳳) 원년 갑자(甲子)에 남자는 왕이 되고 여자를 왕후로 삼았다. 나라 이름을 서라벌(徐羅伐) 또는 서벌(徐伐)이라 하였다. 혹은 사라(斯羅) 또는 사로(斯盧)라고도 하였으며, 처음에 왕이 계정(鷄井)에서 태어났으므로 계림국(鷄林國)이라고도 하였으니 계룡(鷄龍)이 상서로움을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일설에는 탈해왕(脫解王) 때에 김알지(金閼智)를 얻었는데, 숲 속에서 닭이 울었으므로 나라 이름을 계림(鷄林)으로 고쳤다고 한다. 후세에 와서야 신라라는 나라 이름을 정하였다.
◉ 수서(隋書) 신라전(新羅傳)
<수서·열전>: "신라국은 고려의 동남쪽에 있는데 한(汉)나라 때의 낙랑(乐浪)의 땅에서 살며 사라(斯罗)라고 부르기도 한다. 위나라 장수 관구검(毌丘儉)이 고려를 정벌하자(244년~255년) 고려는 패하여 도망쳐 옥저(沃沮)의 땅으로 들어갔다. 그 후에 다시 고국으로 돌아갔는데 남은 자들이 드디어 신라로 되였다. 때문에 그 사람들은 화하(华夏), 고려, 백제인들이 섞여있었는데 옥저, 불내(不耐), 한예(韩獩)의 땅을 겸하였다. 그 왕은 본래 백제인인데 바다로 신라에 동망쳐가 마침내 그 나라의 왕이 되였다. 김진평(진평왕, 579년~632년)에 이르러 개황(开皇, 수문제 양견<杨坚>) 십사년,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치였다.
◉ 선도성모(仙桃圣母), 서술산성모(西述山圣母)
<삼국유사 -선도성모 수희불사>: 진평왕 때 안흥사(安興寺)의 여승 지혜(智惠)가 불전(佛殿)을 수리하려 하였으나 힘이 모자랐다. 그러던 어느 날 꿈에 선도산의 성모가 나타나 불전 수리를 기특한 일이라고 하면서 “내 자리 밑에서 금 열 근을 꺼내 쓰라.”고 하였다. 다음날 지혜가 무리를 데리고 신사(神祠)의 자리 밑을 파 보니 황금 160냥이 나왔다. 이로써 불전 수리는 무사히 마칠 수가 있었다.
그런데 선도산성모(神母)는 본래 중국 제실(中國帝室)의 딸로 이름을 사소(娑蘇)라 하였는데 일찍이 신선술(神仙術)을 배워 신라에 와 머물렀다. 아버지인 황제(皇帝)가 솔개(독수리) 발에 편지를 매어 딸에게 보냈는데, 그 편지에 이르기를 “이 솔개가 머무는 곳에 집을 삼으라.”고 하였다.사소가 그대로 하였더니 솔개가 선도산에 앉았으므로 사소는 그곳의 지선(地仙)이 되었다. 이로써 산 이름을 서연산(西鳶山)이라 하였다.
그 뒤 선도산성모는 오랫동안 이 산에 살면서 나라를 지켰는데 그 동안 신령스러운 일이 자주 일어나 삼사(三祠)의 하나로 삼고 차례를 망제(望帝)의 위에 두었다.신령스러운 일 중에는 신라 54대 경명왕이 매 사냥을 즐기다가 매를 잃고 선도산성모에게 기원하여 되찾은 일이 있으며, 또 다른 일로는 선도산성모가 처음 진한(辰韓)에 와서 아들을 낳아 동국의 첫 임금이 되었다고 하는데 이는 아마 신라 박혁거세왕과 알영(閼英)의 두 성인을 말함일 것이다. 그리고 신라의 계룡(鷄龍)이나 계림(鷄林) 등의 지명도 닭은 원래 서방(西方)에 속하므로 서악(西岳), 즉 선도산과 관계있음을 알 수 있다.
사소부인(娑蘇夫人)
사소부인은 신라의 시조 혁거세거서간(赫居世居西干)과 그의 비인 알영(閼英)의 생모이다. 사소부인은 중국 제실(帝室)의 딸이며 중국에서 진한(辰韓)에 이주하여 살고 있었다. 사소신모(娑蘇神母), 선도성모(仙桃聖母), 선도산성모(仙桃山聖母), 서술산성모(西述山聖母) 등으로도 불린다.
사소부인을 서술산성모라고도 부르는데 "서술(西述)"은 "서촉(西蜀)"과 음이 같다.
◉ 박씨의 기원
1. 남만(南蛮)에서 나왔다. 박호(朴胡)는 동한(东汉) 말의 파군(巴郡, 사천성 동부)의 일곱개 성씨 이왕(夷王)이다. 건안(建安, 한헌제<汉献帝>) 이십년(215년), 조조에 귀속하여 파동태수(巴东太守)로 되여 렬후로 되였다. 후에 류비(刘备)가 군사를 일으켜 두호(杜濩)와 박호(朴胡)를 격파하고 파동을 점령하였다. 후에 파군과 촉군(蜀郡, 사천성 서부)을 합하여 "파촉(巴蜀)"이라고 부른다.
2. 고려에서 나왔다. 오대십국(907년~979년) 시기의 요동지방의 고려인 성씨이다.
3. 북적(北狄)과 만족(满族)에서 왔다. 만족 팔기에 박가씨(朴佳氏)가 있는데 심양에 거주하고 있었다. 청나라 중엽에 성을 박(朴)씨로 바꾸었다.
◉ 위(魏), 박호(朴胡)
동한 말기에 조조(曹操)의 세력이 점차 커져 동한의 조정을 장악하게 되였다. 연강(延康) 원년(220년), 조비(曹丕)가 한헌제(汉献帝)를 페위시키고 조위(曹魏)를 건립하고 낙양에 수도를 정하였다.
동한의 강역을 이어받아 서역에 장사를 설립해 관리하였고 남부는 진령(秦岭), 회하(淮河)로 촉(蜀), 오(吴)를 경계로 하였다. 그리고 관구검이 고구려를 정벌함으로써 조선반도 북부까지 영역을 확장하였다. 263년, 촉한(蜀汉)을 멸망하고 익주(益州, 사천일대)와 남중(南中, 운남, 귀주, 사천 서남부)까지 영역을 넓히였다. 266년 사마염(司马炎)이 왕위를 찬탈한후 국호를 진(晋)으로 하니 조위는 멸망하였다.
박호(朴胡)는 동한(东汉) 말의 파군(巴郡, 사천성 동부)의 일곱개 성씨 이왕(夷王)이다. 건안(建安, 한헌제<汉献帝>) 이십년(215년), 조조에 귀속하여 파동태수(巴东太守)로 되여 렬후로 되였다. 후에 류비(刘备)가 군사를 일으켜 두호(杜濩)와 박호(朴胡)를 격파하고 파동을 점령하였다.
<삼국지·위지>: "건안 이십년(215년) 구월, 파(巴)의 칠성이왕 박호가 파이(巴夷)들을 거느리고 귀속하였다."
◉ 복희와 박호, 파인(巴人), 판순만(板楯蛮)
복희씨(伏羲氏)의 본명을 포계씨(匏系氏)로 보는데 이는 표주박으로 만든 바가지를 의미하는것으로 "복희(伏羲)" 와 "포계(匏系)"는 "박씨(朴氏)"와 음이 같고 모두 같은 뜻을 갖고있다.
<산해경·해내경>: ' 서남에 파국(巴国)이 있다. 태호(太皞, 복희)가 함조(咸鸟)를 낳고 함조가 승리(乘厘)를 낳고 승리가 후조(后照)를 낳았는데 후조에서 파인(巴人)이 시작되였다. 전하는데 의하면 주(周)나라 이전에 지금의 감숙성 남부에 거주하였는데 후에 무락(武落)의 종리산(钟离山, 지금의 호북성 이창시 장양<长阳>)으로 이주하였다. 름군(廪君)을 수령으로 파(巴), 번(樊), 심(瞫), 상(相), 정(郑) 다섯 성씨가 있었다.
진(秦)나라가 파를 멸망한후 파인의 한 갈래는 악(鄂, 호북성)동으로 이주하였는데 동한 때에는 강하만(江夏蛮)으로 서진, 남북조 때에는 오수만(五水蛮)으로 불렸다. 다른 한 갈래는 상(湘, 호남성)서로 이주하여 무릉만(武陵蛮)의 일부로 되였다. 사천, 중경(重庆) 경내에 남은 일부는 판순만(板楯蛮)으로 불렀다.
판순만은 로(卢, 또는 라<罗>), 박(朴, 또는 호<胡>), 답(沓, 또는 잠<昝>), 악(鄂), 도(度, 또는 두<杜>), 석(夕), 공(龚) 등 일곱개 성이 있었다. 판순만은 가릉강(嘉陵江)과 거강(渠江) 양안에 거주하였는데 북으로는 한중(汉中) 동부, 동으로는 장강 삼협(三峡)까지 중경과 사천 동부의 모든 지구에 분포되여 살았다.
[q-댜-판순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