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묘, 서융(西戎), 탕고씨
<산해경·서산경>: "또 서쪽으로 삼백오십리에 천산(天山)이 있는데 금, 옥, 청웅황이 많다. 영수가 나와 서남쪽으로 흘러 탕곡(汤谷)으로 들어간다. 신이 있는데 그 모습이 누런 주머니 같은데 화염처럼 붉다. 발이 여덟개이고 날개가 네개인데 두리뭉실(浑敦)하고 얼굴이 없다. 가무를 아는데 사실 제 강(帝江)이다."
탕고씨는 천황(天皇)의 별칭으로 제 강이 바로 탕고씨이며 또 혼돈씨(浑敦氏)라고 부르기도 한다. 한(汉)나라 이후로 반고씨(盘古氏)로도 기록되였다. 탕고씨 후예들은 성을 "탕고"로 하였고 또 그들이 거주하는 곳은 "탕고"로 불리였다. 고대에 탕(汤)과 당(唐)이 음이 같고 통용 되였기에 또 "당고(唐古)"로 적기도 하였다.
<사기>: "삼묘가 강회(江淮)에 있었는데 형주(荆州)가 여러해 난을 겪고 있으므로 순(舜)이 돌아와 제(요)에게 여쭈어 공공(共工)을 유릉(幽陵)으로 보내니 북적(北狄)으로 되고 환두(欢兜)를 숭산(崇山)으로 보내니 남만(南蛮)으로 되였고 삼묘(三苗)을 삼위(三危)로 보내니 서융(西戎)으로 되였고 극곤(殛鲧)을 우산(羽山)으로 보내니 동이(东夷)로 되였다."
동진(东晋, 266년~420년) 말에 탕고씨들이 중원을 거쳐 발해만 주변에 자리잡고 탕고(당고, 溏沽, 唐古)를 세웠다. 천산 약수(감숙성 흑수)에서 기원하였기에 중원에서는 그들을 "서융(西戎)"이라 불렀는데 "발해융", "약수잡융"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수(隋, 581년~618년) 초에 탕고씨를 포함한 발해잡융들이 장백산맥과 흑룡강 유역으로 이동하는데 습관에 따라 장백산을 "백산"이라 부르고 흑룡강을 "흑수"라 불렀다. 때문에 점차 "백수부(白山部)"와 "흑수부(黑水部)"가 형성되였다.
당(唐, 618년~907년)이 백제, 고구려와 전쟁하며 국력이 점차 쇠약해때 이들이 흥하여 속말, 백산, 백돌, 안차골, 불열, 호실, 흑수 등 칠부로 나뉘였다.
698년, 대조영이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진(震)"이라 하였는데 발해에서 살았던 이유로 "발해국"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이때 탕고씨들은 발해국의 명망 있는 집안이였다.
926년 거란의 황제 아보기가 발해국을 정복하자 탕고씨는 거란에 속하였다.
발해가 멸망하며 발해, 여진으로 나뉘였는데 1146년 완안아골타가 요(辽)를 공격하며 "여진, 발해는 모두 말갈로 원래 한집이다."라고 설득하자 발해인들이 요를 배반하고 여진에 귀속하였다. 아골타가 금나라를 건국하자 탕고씨들은 금나라의 신하로 되였다.
일찍 흥안령 서북부의 후룬베이얼 지역에 자리잡고 살던 탕고씨들을 "몽올실위"라 불렀는데 1206년 테무진이 각부를 통일하고 몽골국을 건국하고 호를 "칭기즈칸"이라 하였는데 텡그리(탕고)를 천신으로 하였다.
1616년 누르하치가 동북을 통일하고 후금을 건국하자 각 부의 탕고씨들이 와서 귀속하였다. 탕고씨, 탕무씨(汤务氏), 탕고랍씨(汤古拉氏), 탕씨(汤氏) 등은 청나라 건국에 많은 공로를 세웠다. 후에 중원의 한족문화의 영향을 받아 점차 당씨(唐氏), 탕씨(汤氏), 양씨(杨氏) 등으로 고치였다.
◉ 탕고, 당고로 된 지명
서장 림주현 탕고향(西藏林周县汤古乡)
사천 구룡현 탕고향(四川九龙县汤古乡)
서장 당고랍산(西藏唐古拉山)
청해 서녕 당고(青海湟源县丹噶尔古城)
감숙 금성 당고(甘肃金城唐古, 指兰州)
하북 당고(河北塘沽)
사천 미산시 탕고산(汤古山)
샹그릴라시 탕구(香格里拉市 汤古)
감숙 천산(기련산) 탕곡(甘肃天山[祁连山]汤谷)
산동 문등 탕곡(山东文登汤谷)
[f-바-탕고로 된 지명]
곰부락-유웅씨/구려의 후예-삼묘, 탕고씨의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