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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의 시작/백제와 목지국

백제(百济)와 목지국(目支国)

by 성수록 2024. 3. 25.

◉ 백제(百济)

<삼국사기>에 따르면 백제는 기원전 18년 온조(温祚)가 고구려에서 나와 남하하여 아리수(阿利水, 한강<汉江>) 유역에 세웠는데 위례성(慰礼城, 서울)에 도읍하였다.

백제가 중국사서에 처음 나온것은 <삼국지·위서·오환선비동이전>인데 3세기의 마한 오십사국중에 "백제국(伯济国)"이란 나라가 있었다.

"백제"의 뜻에 대해서 <삼국사기>에는 백제의 시조 온조왕이 고구려에서 남하하여 건국할때 열명의 신하가 보좌하였기에 "십제(十济)"라고 하였는데 후에 온조의 형 비류부(沸流部, 미추홀<인천>에 도읍 함)의 사람들이 돌아와 합류하면서 백성이 즐겁게 따르다는 뜻으로 "백제"로 고치였다고 한다. 중국 사서인 <수서>에서는: "백집이 바다를 건넜기에 백제라 하였다."라고하였다.

246년, 진한(辰韩)의 여덟개 국을 나누는 문제때문에 마한(马韩)과 위나라(魏国)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는데 이로하여 마한의 세력이 크게 약화되면서 본래 중심세력이였던 목지국(目支国, 월지국<月支国>)의 지위가 약화되였다. 이런 상황에서 백제가 목지를 대체하여 마한의 중심세력으로 된듯하다. 이 시기는 고이왕(古尔王, 백제 제8대 왕)의 재위시기로 주변세력과 연합하여 영토를 확장하여 백제 초기의 영역을 확보한다.

<진서>에 345년, 동진의 연왕관원 봉유(封裕)의 상서에"구려(句丽), 백제(百济), 우문(宇文), 단부(段部)의 사람,"이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때에는 이미 "백제(百济)"라는 국호를 사용하였음을 알수있다.

414년에 세워진 고구려 호태왕비문 중에 "백잔(百残)"이라고 적었는데 이것은 고구려가 백제를 업신여겨서 부른 이름인듯 하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538년 백제의 성왕이 도읍을 사비(泗沘, 충청남도 부여)로 옮길때 국호를 "남부여(南扶余)"로 하였다고 하였는데 실제로 사용한 기록은 없다.

백제는 동서로 사백오십리, 남북으로 구백여리인데 남쪽으로 신라와 접하였고 북으로 고려와 마주했는데 도읍을 거발성(충청남도 공주시)이라고 하였다. 그들속에 신라, 고려, 왜 등의 사람들이 섞여있었는데 중국인도 있었다. 복장은 고려와 비슷하였다. ... ... ... 사람들은 모두 산에서 살았다. 큰 밤이 있다. 사계절의 가운데 달마다 왕이 하늘과 오제(五帝)의 신에 제사를 지내였다. 그 시조 구태(仇台)의 묘를 국성에 세우고 해마다 네번 제사를 지내였다. 나라의 서남쪽의 사람들은 섬에 살았는데 열다섯 곳이나 되였고 모두 성읍을 갖고 있었다.

그 남쪽 바다를 석달 가면 담모라국(𨈭牟罗国)이 있는데 남북이 천여리이고 동서가 수백리인데 땅에는 노루와 사슴이 많고 백제에 부용하였다. 백제에서 서쪽으로 삼일 가면 맥국(貊国)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