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국사기( 1145년, 김부식)
二十一年, 春二月, 王以丸都城經亂, 不可復都, 築平壤城, 移民及廟社. 平壤者, 夲校勘 仙人王儉之宅也. 或云, “王之都王險.”
21년(247년) 봄 2월, 왕이 환도성은 전란을 겪어 다시 수도로 할수 없으므로 평양성을 수리하고 백성, 및 종묘와 사직을 옮기였다. 평양으로 말하면 선인 왕검(王儉)의 터이다. 혹은 "왕의 수도 왕험(王險)이다." 라고 한다.
◉ 삼국유사(1281년~1283년, 일연)
《삼국유사》 기이 제1
고조선【왕검조선】
위서(魏書)에는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에 단군왕검(壇君王儉)이 있어서, 아사달(阿斯逹)에 도읍을 세우고 나라를 열어 조선(朝鮮)이라 불렀으니 고(高: 요 임금)와 같은 때였다."라고 하였다.
고기에는 "옛날에 환인(제석을 가르킨다.)의 서자 환웅이 있어서 자주 천하에 뜻을 두어 인간 세상을 구하기를 탐냈다. 아버지가 아들의 뜻을 알고 천부인 3개를 주고 가서 그곳을 다스리도록 하였다. 웅은 무리 3천을 이끌고 태백산정의 신단수 아래로 내려왔으니, 그곳을 신시라 부르고 이분을 환웅천왕이라고 부른다. 풍백, 우사, 운사를 거느리고 곡식, 운명, 질병, 형벌, 선악 등을 주관하니 무릇 인간의 360여 일들을 주관하여 세상에 있으며 다스리고 교화하였다. 이때 한 범과 한 곰이 있어서 같은 굴에 살았는데, 항상 신웅에게 기도하기를 변화하여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었다. 이때 신이 신령한 쑥 한 줌과 마늘 20매를 주면서 '너희가 이것을 먹으면서 백 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사람의 모습을 얻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곰과 범이 받아서 이를 먹고 삼칠일 동안 삼갔더니 곰은 여자의 몸을 얻었지만 범은 삼가지 못해서 사람의 몸을 얻지 못했다. 웅녀는 함께 혼인을 맺지 못하므로 매양 단수 아래에서 아이 가지기를 바라며 빌었다. 웅이 이에 가화하고 그와 혼인하여 아이를 배니 아들을 낳으므로 단군왕검이라 불렀다. 당고 즉위 50년 경인에 평양성에 도읍하여 처음으로 조선이라 칭했다. 또 도읍을 백악산 아사달로 옮겼는데 또는 궁홀산이나 또는 금미달이라고도 한다. 나라를 다스림이 1500년이었다. 주 호왕 즉위 기묘에 기자를 조선에 봉하니, 단군은 이에 장당경으로 옮겼다가 뒤에 돌아와 아사달에 숨어서 산신이 되었다. 나이는 1908세였다고 한다."
◉ 제왕운기(帝王韻紀, 1287년, 이승휴)
《제왕운기》 하권
初誰開國啓風雲 / 처음 누가 나라를 열고 풍운을 시작했나?
釋帝之孫名檀君 / 제석의 손자로 이름은 단군이라.
竝與帝高興戊辰 / 고(요임금)와 함께 나란히 무진에 흥하여,
經虞歷夏居中宸 / 우(순임금)를 지나 하를 거쳐 대궐에 살다가
於殷虎丁八乙未 / 은 호정 8년 을미에
入阿斯達山爲神 / 아사달산에 들어가 신이 되었네.
◉ 조연수(趙延壽) 묘지명
《제대조기(第代朝記)》에 이르길 "환인의 아들 환웅이 태백산 신단 아래에 내려와 거처하였다. 환웅이 하루는 백호와 교통하여 아들을 낳으니, 이가 곧 단군이다" 하였다.
원문: 第代朝記云 桓仁之子桓熊 降于太白山神檀下居焉 熊一日與白虎交通生子 是謂檀君
◉ 응제시주(應濟詩註, 권근 1352년~1409년)
처음으로 옛 동이를 연 임금
권근주: 옛날에 신인이 박달나무 아래로 내려오니 나라 사람들이 그를 왕으로 세우고 인하여 그를 단군이라 불렀다. 이때가 당요 원년 무진년이다. 고기에 말하기를 상제 환인에게 서자가 있었는데, 웅이라 하였다. 인간세상을 탐내어 인간이 되어 천부인 3개를 받아 무리 3천을 거느리고 태백산 신단수 아래로 내려오니 이 분이 환웅 천왕이다. 환(桓)은 혹은 단(檀)이라고도 한다. 산은 지금의 평안도 희천군 묘향산이다. 풍백, 우사, 운사를 거느리고 곡식, 명, 병, 질병, 형벌, 선악 등 인간 세상의 360여 가지 일을 주관하게 하여 세상을 다스리도록 하였다. 이때 곰 한 마리와 범 한 마리가 같은 굴 속에서 살고 있었는데, 항상 환웅에게 사람이 되기를 기원하였다. 이때 환웅이 신령스런 쑥 한 다발과 마늘 20개를 주면서 말하기를 "너희는 이것을 먹되 햇빛을 100일 동안 보지 않으면 사람의 형상이 되리라." 하였다. 범과 곰은 그것을 먹고 금기하였는데, 범은 금기를 지키지 못했지만 곰은 금기를 잘 지켜 21일 만에 여자가 되었다. 그러나 혼인할 상대가 없어 매양 신단수 아래에서 잉태하기를 빌었다. 이에 환웅은 잠깐 사람으로 변신하니 웅녀는 잉태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이름이 단군이다. 단군은 당요와 같은 날에 나라를 세우고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 불렀다. 처음 도읍지는 평양이었고 뒤의 도읍지는 백악산이었다. 비서갑 하백의 딸에게 장가 들어 부루를 낳았는데 이분이 동부여왕이다. 하나라 우왕 때에 이르러 제후들이 도산에 모일 때, 단군은 태자 부루를 보내었다. 단군은 하나라 우 임금을 거쳐 상 무정 8년 을미에 아사달 산에 들어가 신이 되었다. 지금의 황해도 문화현 구월산이다. 사당이 지금도 있다. 나라를 누리기 1048년이었다. 그 뒤 164년 후 을묘에 기자가 와서 분봉받았다.
◉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지리지
《단군고기(檀君古記)》에 이르기를, “상제 환인이 서자가 있으니, 이름이 웅인데, 세상에 내려가서 사람이 되고자 하여 천부인 3개를 받아 가지고 태백산 신단수 아래에 강림하였으니, 이가 곧 단웅천왕이 되었다. 손녀로 하여금 약을 마시고 인신이 되게 하여, 단수의 신과 더불어 혼인해서 아들을 낳으니, 이름이 단군이다. 나라를 세우고 이름을 조선이라 하니, 조선(朝鮮), 시라(尸羅), 고례(高禮), 남·북 옥저(南北沃沮), 동·북 부여(東北扶餘), 예(濊)와 맥(貊)이 모두 단군의 다스림이 되었다. 단군이 비서갑 하백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을 낳으니, 부루(夫婁)이다. 이를 곧 동부여 왕이라고 이른다. 단군이 당요와 더불어 같은 날에 임금이 되고, 우(禹)가 도산(塗山)의 모임을 당하여, 태자 부루를 보내어 조회하게 하였다. 나라를 누린 지 1천 38년 만인 은(殷)나라 무정(武丁) 8년 을미에 아사달에 들어가 신이 되니, 지금의 문화현(文化縣) 구월산(九月山)이다.
◉ 청학집(靑鶴集)
금선자가 말했다. 변지의 기수사문록이라는 책은 우리 동방 동방 도인들의 모든 것을 기록하고 있는데 거기에 이런 말이 있다. 환인진인(桓仁眞人)은 명유(明由)로부터 도를 배웠고 명유는 광성자(廣成子)로부터 도를 배웠는데 광성자는 옛날의 선인이다. 환인은 동방 선파의 시조가 되었는데 환웅천왕(桓雄天王)은 환인의 아들로서 그 뜻을 계승하고 그 일을 실천함과 아울러 풍우(風雨)와 오곡 등 360가지 일을 주관하여 동방의 백성들을 교화시켰다. 단군이 그 일을 잇고 교화를 행한 지 10년, 구이(九夷)가 모두 받들어 천왕(天王)으로 세웠다. 단군은 쑥대풀로 엮은 정자와 버드나무로 지은 궁궐에서 살며 머리를 땋고 소를 타고 다니면서 나라를 다스렸는데, 세상을 주관하기 1048년에 아사산(阿斯山)에 들어가 선거(仙去)하였다.
그 후에 문박씨(文朴氏)가 아사산에 살았는데 환한 얼굴에 모난 눈동자로 능히 단군의 도를 터득하였다. 영랑(永郞)이란 사람은 향미산(向彌山) 사람이다. 나이 90에도 어린애의 얼굴빛이었으며 해오라비 깃의 관을 쓰고 철죽(鐵竹) 지팡이로 산과 호수를 소요하였는데 마침내 문박의 가르침을 전하였다. 마한(馬韓) 시절에는 신녀 보덕(普德)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바람을 타고 다녔고 거문고를 안고 노래를 불렀는데 용모가 마치 가을 물의 부용꽃과 같았다. 그녀는 영랑의 도를 계승하였다.
◉ 오계일지집(梧溪日誌集)
옛 기록에 의하면, 구월산(九月山)에 팔대(八臺)가 있는데 산꼭대기의 비서갑비(匪西岬妃)가 여기에 와서 노닐 제 상서로운 기운이 무지개와 같았다고 한다. 단제(檀帝)가 비서갑비를 맞아 왕비로 삼고 성자(聖子) 3인을 낳았는데 장자는 부소(扶蘇), 차자는 부루우(扶婁虞), 삼자는 부여(扶餘)라 하였다. 중국의 요 임금 25년, 무진년에 왕검(王劍)이 임금이 되어 아사달(阿斯達)을 서울로 삼고 국호를 조선이라 하였는데 이분이 최초의 단군이었다. 제위한 지 93년, 경자년에 신으로 모셔졌고 태자 부루가 임금이 되었다. 아사달산에 들어가 도를 닦다가 은 나라 무정 임금 8년, 갑자년에 금린(金麟)을 타고 신선이 되어 사라졌다.
하루는 한휴휴(韓休休) 선생을 따라 백년산(白寧山)을 지나다가 백학(白鶴) 두 쌍이 봉우리 위를 맴돌고 있는 것을 보았다. 내가 여쭙기를 "이 산에 학이 삽니까?"라고 하자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저것들은 학이 아니라 옥판(玉版)의 정(精)이니라. 저 봉우리 바위 틈에 돌 궤짝을 숨겨 놓았는데 궤짝 속에는 옥판이 4개가 있다. 옥판 위에는 금자(金字)로 글을 써 놓았으니 단군 시절 문박(文朴), 대왕(大往), 신지(神誌) 등의 성인들이 기록한 것으로 모두 변화, 장생의 비결들이다."라고 하셨다.
◉ 세종실록
문화현을 관향으로 한 조선시대에 문화류씨들은 이 지역의 전통 지키기에 최선을 다하였다. 즉 조선 태종 때 삼성당(三聖堂)을 폐하여 평양의 단군묘(檀君廟)에 함께 모셨는데, 1428년(세종10)에 우의정을 지낸 유관(柳觀, 1346~1433)은 이를 두고 세종 때 상소한 일이 있음을 《세종실록》 권40, 세종10년 6월 14일 조에는 아래와 같이 기록하고 있다. “우의정으로 그대로 치사(致仕)한 유관(柳寬)이 상서(上書)하기를, “황해도 문화현(文化縣)은 신의 본향(本鄕)입니다. 스스로 벼슬을 그만두고 본향에 내려온 지가 여러 해 되었는데 여러 부노(父老)들의 말을 듣고 비로소 〈이 고을이〉 사적(事迹)이 오래인 것을 알았습니다. 구월산(九月山)은 이 현의 주산(主山)입니다. 단군조선 때에 있어서는 이름을 아사달산(阿斯達山)이라고 하였고, 신라 때에 이르러 궐산(闕山)이라고 고쳐 불렀습니다. 그때 문화현을 처음으로 궐구현(闕口縣)이라고 명명하였습니다. 전조(前朝)에 이르러서는 유주 감무(儒州監務)로 승격시켰으며, 고종 때에 이르러 또 문화 현령(文化縣令)으로 승격하였고, 산의 이름의 「궐」자를 느린 소리로 발음하여 구월산(九月山)이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이 산의 동쪽 재[嶺]는 높고 크고 길어서 일식 정도 가야 안악군(安岳郡)에 이르러 끝납니다. 재의 중허리에 신당(神堂)이 있는데 어느 시대에 처음 세웠는지 알지 못합니다. 북쪽 벽에는 단웅 천왕(檀雄天王), 동쪽 벽에는 단인 천왕(檀因天王), 서쪽 벽에는 단군 천왕(檀君天王)을 문화현 사람들은 삼성당(三聖堂)이라고 항상 부르며, 그 산 아래에 있는 동리를 또한 성당리(聖堂里)라고 일컫습니다. 신당(神堂)의 안팎에는 까마귀와 참새들이 깃들이지 아니하며, 고라니와 사슴도 들어오지 않습니다. 날씨가 가물 때를 당하여 비를 빌면 다소 응보를 얻는다고 합니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단군은 아사달산(阿斯達山)에 들어가 신선이 되었으니, 아마도 단군의 도읍이 이 산 아래에 있었을 것이다.’라고 합니다. 삼성당은 지금도 아직 있어서 그 자취를 볼 수가 있으나, 지금은 땅 모양을 살펴보건대, 문화현의 동쪽에 이름을 장장(藏壯)이라고 하는 땅이 있는데, 부로들이 전하는 말에 단군의 도읍 터라고 합니다. 지금은 증험(證驗)이 될 만한 것은 다만 동서 난산(東西卵山)이 있을 뿐입니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단군이 왕검성(王儉城)에 도읍하였으니, 지금 기자묘(箕子廟)가 있는 곳이 바로 그곳이다. ’라고 합니다. 신이 살펴본 바로는, 단군은 요(堯)임금과 같은 때에 임금이 되었으니, 그때부터 기자에 이르기까지는 천여 년이 넘습니다. 어찌 아래로 내려와 기자묘와 합치하여야 한단 말입니까. 또 어떤 이는 말하기를, ‘단군은 단목(檀木) 곁에 내려와서 태어났다 하니, 지금의 삼성(三聖) 설은 진실로 믿을 수 없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신이 또 살펴보건대, 태고(太古)의 맨 처음에 혼돈(混沌)이 개벽(開闢)하게 되어, 먼저 하늘이 생기고 뒤에 땅이 생겼으며, 이미 천지(天地)가 있게 된 뒤에는 기(氣)가 화(化)하여 사람이 생기었습니다. 그 뒤로 사람이 생겨나서 모두 형상을 서로 잇게 되었으니, 어찌 〈사람이 생긴 지〉 수십만 년 뒤의 요임금 때에 다시 기가 화하여 사람이 생겨나는 이치가 있었겠습니까. 그 나무 곁에서 생겼다는 설은 진실로 황당무계한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성감(聖鑑)으로 헤아려 결정하시고, 유사(攸司)에 명하여 도읍한 곳을 찾아내어 그 의혹을 없애게 하소서.””라고 하였다.
◉ 구전문학 속 신화
► 문화현 출신의 우의정 유관(柳寬)의 상소문
降於樹邊而生, 今之三聖, 固不可信
나무 옆에 내려서 낳았다고 하는데 지금의 삼성은 여전히 믿을바가 못 된다.
► 평양시 강동군 남쪽 구빈마을의 전설
단군이 거느리는 박달족이 마고할미가 족장인 인근 마고성의 마고족을 공격했다. 싸움에서 진 마고할미는 도망친 후 박달족과 단군의 동태를 살폈는데 단군이 자신의 부족에게 너무도 잘해 주는 것을 보게 된다. 마고는 단군에게 마음으로 복종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단군은 투항한 마고할미와 그 아래 아홉 장수를 귀한 손님으로 맞아 극진히 대접했다. 아홉 손님을 맞아 대접한 곳이 구빈(九賓)마을이고, 마고가 항복하기 위해 마고성으로 돌아오면서 넘은 고개를 왕림(枉臨)고개라고 한다.
► 《한국구전설화전집》구미호 관련 전설
"옛날 옛적 밥도, 옷도 나무에서 따서 구하던 때 하늘에서 사람이 하나 떨어졌는데 그 거시기가 예순 댓발이나 해서 모든 동물들이 기겁하고 멀리한다. 그러나 곰이 그를 굴 속에 맞이하여 단군을 낳았고, 그 후 여우가 맞이하여 기자(箕子)를 낳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