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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고양씨 전욱/부우, 부여, 비여

부여(扶余), 부우, 비여

by 성수록 2024. 3. 24.

◉부우의 산(附禺之山)

<사기·오제본기>: "황제의 아들 창이가 약수에 내려가 살면서 촉산씨(蜀山氏)의 여자를 취하여 제 전욱(颛顼)을 낳았다." 촉(蜀)이 사천성(四川省) 성도 일대에 존재했던 옛 나라 이름이였던 연고로 수많은 역사학가들이 전욱을 사천성과 연결 짓는다. 하지만 약수(若水)의 "약(若)"자는 응당 옛 알타이어에 속하며 그 뜻은 "푸르다." 또는 "검다."의 뜻으로 씌였다. 또 촉산씨의 "촉(蜀)"자도 상나라 때의 갑골문에는 밑변의 "충(虫)"자가 없는데 그 글자 모양은 내몽골 삼성타랍(三星他拉)에서 출토 된 큰 눈알을 가진 옥조각 룡(내몽골자치구 적봉시 옹우특기 옥룡사호<玉龙沙湖>) 과 완전히 비슷하다. 때문에 옛 촉산(蜀山)이 지금의 사천성(四川省)에만 국한된것이 아니였다.

[i-댜-촉과 옥룡]

<좌전>: "위(卫, 하남성 복양시), 전욱의 터이다. 때문에 제구(帝丘)라고 부른다." 여기에 근거하여 복양시(濮阳市)에서는 전욱제(颛顼帝)가 용을 타고있는 조형물을 세우기도 했다. 초기의 용(龙) 유적은 기원전 5, 6천년경의 요녕성 부신시 사해유적(查海遗址)에서 발견 된 돌무더기 용 유적으로 이 유적은 초기 홍산문화에 속한다. 대신 복양시에서 발견 된 조가비로 모자이크 한 용과 범의 유적은 기원전 4천년 경으로 그 년대가 사해유적보다 늦다. 때문에 복양시의 용 문화는 북방의 용 문화의 영향을 받는것이 시간상으로 그 순서가 맞다.

<진서·모용방재기>: "진혜제(晋惠帝) 원강 사년(294년), 원래 도하 대청산(大青山, 료녕성 릉해시 북쪽)의 선비족 수령 모용방이 '대극성(大棘城)은 바로 제 전욱의 터이다.'라고 하며 옮겨와 살았다."

<자치통감> 주석: "조양성(朝阳城) 동쪽 구십리에 극성이 있는데 바로 전욱의 터이다."

전욱의 터가 되는 대극성에 대해 약간의 의견 차이가 있지만 대체적으로 금주시 의현(义县)의 북쪽, 부신(阜新)의 남쪽 지구에 있었다고 보고있다. 대극성의 구체적 위치에 대해 두가지 설이 있는데 하나는 지금의 요녕성 조양시 북표시 삼관영촌(三官营村)이고 다른 하나는 요녕성 조양시 북표시 구관대문(九官台门)이다.

<산해경·대황북경>: "동북해의 밖, 대황 가운데, 하수(河水) 사이에 부우의 산(附禺之山)이 있는데 제 전욱과 아홉 빈을 장사 지내였다."

<산해경>: "한수(汉水)가 부어의 산(鲋鱼之山)에서 나온다. 제 전욱을 양지에 장사지내고 아홉 빈을 음지에 장사지냈는데 네마리의 뱀이 지킨다."

<산해경>: "당제의 산에서 부수옥(浮水玉, 물에 뜨는 옥)이 나는데 무려(巫闾)의 땅이다. 그곳의 나무들은 무늬가 많다."

부우산(附禺山)은 또 무우산(务禺山), 부어산(鲋鱼山)으로도 불리는데 "부우(附禺)"와 "부어(鲋鱼)", "부옥(浮玉)", "부여(扶余)"는 발음이 같다. 때문에 "부어의 산"은 "부여의 산"이며 부여 땅에 있던 의무려산(医巫闾山)일 가능성이 높다. 역사학자 풍립민(冯立民)은 제 전욱이 처음으로 의무려산의 선하(先河)에 제사 지내였고 그가 죽은 후 의무려산 남측 보림루(宝林楼) 일대에 묻혔고 그의 아홉 왕비는 그 산 반대편에 묻혔다고 여긴다. 의무려는 지금의 요녕성 금주시 경내에 있으며 우미려(于微闾), 무려산(无虑山), 이오려(伊吾闾)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i-더-용유적,대극성,의무려]

◉부여(扶余)

<논형·길험편>: " 북이(北夷) 탁리국(橐离国) 왕의 시비가 임신하였는데 왕이 죽이려 들자 시비가 '하늘에서 큰 알이 저한테 들어와 임신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이 시비가 아들을 낳았는데 바로 부여를 세운 동명(东明)이다. 동명이 태여났을 때 돼지우리와 마구간에 던져졌지만 죽지않았다. 자란후 탁리국에서 도망쳐 부여국을 세웠다."

<사기·화식열전>에서 최초로 "부여"가 보인다. <사기·화식열전>: "부연(夫燕) 역시 발해와 갈석산 사이의 한개 도읍이다. 남쪽은 제(齐), 조(赵)와 통하고 동북쪽은 호인(胡人)과 접하고 있다. ... ... ... 북쪽은 오환(乌桓), 부여(夫余)와 인접하고 동쪽은 예맥(秽貊), 조선(朝鲜), 진번(真番)을 통제하기 좋은 위치이다."

<후한서·동이열전>: "부여국은 현토(玄菟)의 북쪽 천리에 있다. 남쪽은 고구려, 동쪽은 읍루, 서쪽은 선비와 접하고 있으며 북쪽에는 약수(弱水)가 있다. 땅이 이천리이며 본래 예(濊)의 땅이다."

부여(扶余)는 또 "부여(夫余)", 부유(凫臾)"라고도 부른다. 초기 도읍은 길림성 길림시였는데 나중에 길림성 장춘시 농안현(农安县)으로 옮기였다. 부여인들은 도읍을 예성(濊城)이라 불렀는데 본래 예맥(濊貊)의 땅이였다. 또 부여인들은 스스로를 "망인(亡人)"이라 불렀다. 부여는 기원전 2세기에 나라를 세워 494년 동부여가 고구려에 의해 멸망할때까지 지속되였다. 옥저(沃沮), 동예(东濊) 등이 부여계에 속한다.

◉비여(肥如)

비여는 비자국(肥子国), 또는 비루(肥累)라고 부른다. 북적(北狄)의 한 갈래인 백적(白狄)이 세웠으며 황제의 후손으로 성이 희(姬)씨이다. 초기에는 왕옥산(王屋山, 하남성 제원시)과 중조산(中条山, 산서성 영제시 동남쪽) 이북에 흩어져 살았으며 수도는 석양(昔阳, 山西昔阳)이였다. 서주(西周) 때에 고성(藁城, 하북성 석가장시 고성구) 서부에 비국(肥国)을 세우는데 후에 진(晋)나라에 의해 멸망하고 그 후예들이 북으로 옮기여 무순(抚顺, 요녕성 무순시) 일대에서 비리국(陴离国, 裨离国)을 세운다. 또 다른 설로는 북으로 옮기여 부여의 고국인 탁리(橐离, 혹은 색리<索离>)를 세웠다고도 한다.

[i-뎌-부여,비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