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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부락-유웅씨/헌원과 황제

헌원과 황제

by 성수록 2024. 3. 23.

◉헌원(轩辕)과 황제(黄帝)

이전에 소전씨가 있었는데 염제와 황제를 낳았다. 염제는 강수(姜水) 변에서 자라 강씨성을 가졌고 황제는 희수(姬水) 변에서 자라 희씨성을 가지게 되였다. 황제의 성은 희씨이며 "헌원의 언덕"에 거주하였기에 "헌원"이라 하였다. 또는 이름이 구름 "운"이라 하여 "희운(姬云)"이라고도 하였다. 상서로운 구름의 운을 지녔기에 구름으로 일을 기록하였다.

흙의 기운을 가졌기에 호를 흙의 색인 황제(黄帝)라고 하였다. 유웅( 현재 하남성 신정)에 도읍을 세웠기에 유웅씨(有熊氏)라고도 불렀다. 판천(阪泉)에서 염제를 이기고 탁록(涿鹿)에서 치우를 이기고나서 제후들이 그를 천자로 받들었다. 헌원황제는 희수에서 즉위하여 나주에 탁록으로 도읍을 옮기였다.

 

황제의 이름이 헌원이라는 설은 전국시대(기원전 475년~기원전221년)에 처음 제기되여 후세의 역사학가들이 사서에 기록하는 계기가 되였다. 제일 최초 "헌원"과 "황제"를 한사람으로 묶어버린것은 서한(기원전202년~8년)의 대덕인데 그가 쓴 <대덕예>중에 <제계성>에서 말하길: "소전이 헌원을 낳았는데 그가 황제이다." 후에 사마천이 이에 근거하여 <사기·오제본기>에 다시 강조하여: "황제는 소전의 아들이고 성은 공손(公孙)이고 이름은 헌원이다."라고 하였다. 사실 황제의 성과 씨에 대해서 전해 내려오는 설이 다양하여 그것의 진위를 가리기 어렵다.

춘추시대에 각국의 제후들은 작위의 높낮이와 상관없이 모두 "공(公)"으로 불리였다. 주나라를 비롯해 기타 나라들의 군주는 맏아들로 계승했는데 "태자"라고 불렀으며 그 외의 아들들은 "공자(公子)"라고 칭하였다. 그리고 공자의 아들들은 공손이라고 하였는데 후세에 점차 "공손"이 성씨로 자리잡게 된다. 황제의 성 "공손"도 여기에서 유래한것이라고 보면 되겠다.

<헌원황제전>은 현재 남아있는 황제전기에 대한 제일 완전한 기록이다. 무측천때 그것을 인용한 사람이 있었다는것은 이미 그때 그 책이 존재했음을 말한다. 남송때 <헌원본기>도 그것을 참고하였다. 여기에서도 소전(少典)은 복희의 아들이고 헌원은 복희의 손자라고 기록되여있다. 송나라때 <로사·국명기>에도 "소전, 유웅씨가 나라를 세웠는데 지금의 신정(현재 하남성 신정시)이다" 라고 기록하였다.

대신 주나라 <제계보>, 당나라의 <원화성찬>, <삼황묘비>에는 복희가 유교씨의 소전을 왕비로 취하여 염제와 황제를 낳았다고 하였고 선진시기의 <세본>에도 복희가 소전을 왕비로 취하였다고 하였다.

◉황제와 광성자(广成子)

<청학집(靑鶴集, 조선 명종 때의 도사 조여적이 쓴 책)>:금선자가 말했다. 변지의 "기수사문록"이라는 책은 우리 동방 도인들의 모든 것을 기록하고 있는데 거기에 이런 말이 있다. 환인진인(桓仁眞人)은 명유(明由)로부터 도를 배웠고 명유는 광성자(廣成子)로부터 도를 배웠는데 광성자는 옛날의 선인이다.

<장자·재유편>에 말하길: "황제 십구년에 공동라산에서 광성자를 만났다." 공동산은 우주(禹州, 하남성 우주시)성 서북 20킬로에 있는 천정과 장장 두현이 맞붙은 곳에 있다. " 광성자는 황제시대의 도교인물로 전해진다. 공동산의 신선동에서 수행하고 있었으며 황제가 가서 만났고 스승으로 모셨으며 치국의 기술을 물었다고 하였다.

◉헌원이 수레를 만들다

헌원씨는 공상(空桑, 현재 산동성 서남부, 안휘성 북부, 하남성 동부 등 지역)의 북쪽에서 살았는데 "봉초"가 바람에 뒹구는것을 보고 수레를 만들었다고 한다. 가름목을 "헌(轩)", 내림목을 "원(辕)이라 불렀기에 호를 "헌원씨"라 하였다.

해중(奚仲)은 황제의 후대이다. 황제가 우양(禺阳, 우양은 임씨<任氏> 부족의 족장이고 임씨성의 시조이다. )을 낳았고 우양이 우호(禺号)을 낳았으며 우호는 음량(淫梁)을 낳았고 음량은 반우(番禺)를 낳는데 반우가 바로 해중의 부친이다. 해중은 설(薛, 산동성 등주시<滕州市>)의 땅에 살았는데 하(夏)나라때 차복(车服)을 관리하는 관직에 있었다. 해중이 길광(吉光)을 낳았는데 길광이 처음으로 나무로 수레를 만들었고 여전히 부친의 관직을 이어받았다. 이것 때문에 후세에 해중이 차를 만들었다고 전해졌으며 해중이 헌원 황제의 후손이였으므로 임씨들은 스스로 자신들이 헌원씨이며 인황(人皇), 황족(皇族)이라 칭하였다.

[f-갸-헌원 수레]

◉헌원의 언덕(轩辕之丘), 헌원의 나라(轩辕之国)

<산해경·서산경>: 또 서북쪽으로 삼백오십리에 "옥산(玉山)"이 있는데 "서왕모(西王母)"가 살고 있다. ... ... ... 또 서쪽으로 사백팔십리에 "헌원의 언덕"이 있는데 초목이 자라지 않는다. 순수(洵水)가 흘러나와 남쪽으로 흘러 흑수(黑水)로 들어간다. 거기에는 수수(丹粟)와 청웅황(青雄黄)이 많이 난다.

<산해경·해외서경>: 무함국(巫咸国)은 여축(女丑)의 북쪽에 있는데 ... ... ... 여자국(女子国)은 무함의 북쪽에 있으며 물이 에워싸고 있다. ... ... ... 헌원국은 궁산(穷山) 변두리에 있는데 팔백살은 거뜬히 산다. 여자국의 북쪽에 있으며 사람 얼굴에 뱀의 몸뚱이를 가졌고 꼬리를 머리에 감았다. 궁산이 그 북쪽에 있는데 서쪽으로 향해 감히 (활을) 쏘지 못하는데 헌원의 언덕이 있기때문이다. 헌원국 북쪽에 있는 그 구릉(헌원의 언덕)은 네모난데 네마리의 뱀이 서로 휘감겨있다.

<제원현지>: 왕옥현(王屋县, 하남성 제원시 왕옥진) 서쪽 백이십리에 왕들이 타는 수레 지붕처럼 생긴 산이 있는데 꼭대기에 단(坛)이 있고 헌원이 하늘에 제사지내던 단으로 전해지며 때문에 천단(天坛)이라 부른다.

<고사>, <문헌통고> 등에: "헌원은 방패와 창을 쓰기 즐긴다." 고 적혀있는데 <료사·지리지>(원)에: "요가 구주(九州)를 나누었는데 순이 기(冀), 청(青)의 땅이 크므로 유(幽), 병(并), 영(营)주로 나누었다. 영주(营州, 요녕성 조양시)는 동쪽으로 요해(辽海)에 미치는데 그 땅은 산을 등지고 바다와 접해있으며 그 백성은 방패와 창을 지니고 잘 싸움으로 예로부터 용무(用武)의 땅이라 하였다.

[f-거-헌원의 땅]

◉헌원 성씨의 분포

헌원 복성으로는 명망 있는 집안이 현재 산서성 장치시(长治市)와 섬서성 합양현(合阳县)이며 산동성, 요녕성, 베이징시에 많이 분포되여 있다.

헌씨로 득성한 시조로는 헌여군(轩汝君), 헌여신(轩汝臣), 헌여의(轩汝义)가 있는데 이들의 후손들은 하북성 북부와 요녕성 서부, 베이징시 등에 분포되여있다.

[f-겨-헌원 성씨 분포]

◉역사기록속의 헌원과 황제

<반고왕표>

중원활약시기: 헌원씨, 축용씨, 호영씨, 유소씨, 주양씨, 음강씨, 무회씨, 신농씨

천하화평시기: 황제유웅씨, 전욱, 제고, 요, 순

<반고왕표> 를 보면 헌원과 황제는 다른 시기의 인물이다.

<월절서·외전기보검>: "헌원, 신농, 혁서 시기에는 돌로 병사를 무장하고 끊어진 나무로 궁전을 지었으며 죽으면 용장(龙臧)하였다. 황제 시기에는 옥으로 병사를 무장하고 나무를 잘라서 궁전을 지었다. 죽으면 용장하였다. "

<월절서·외전기보검>에도 헌원과 황제는 다른 시기의 인물이다.

◉황제 유웅씨에 대한 역사 기록

<서언왕지>: 오랜 옛날, 소전씨(少典氏)의 나라가 있었는데 유교(有蟜)를 취하여 헌원을 낳았는데 황제로 되였고 성은 희(姬)씨이다.

<금본죽서기년>: 어머니는 부보(附宝)인데 번개가 북두추성을 둘러싸고 들판을 비추니 그 기운을 받아 임신하였다. 이십오개월 뒤에 황제를 수구(寿丘)에서 낳았는데 어리나 말을 할수 있었고 용의 얼굴에 성덕을 갖고 있었다.

<헌원황제전>: 헌원황제는 성이 공손이고 유웅국(有熊国)의 왕 소전의 차자이다. 어머니는 서교씨(西乔氏)의 여자이고 이름은 부보이다. ... ... ... 이십사개월만에 헌원을 수구에서 낳았다. ... ... ... 희수(姬水)에서 자랐다. ... ... ... 유웅국의 왕을 이어받았다. 고관 대작들의 수레와 옷인 헌면(轩冕)을 만들었기에 호를 "헌원"이라고 하였다. 흙의 덕을 가진 왕이였기에 "황제라고 불렀다.

<제왕세기>: 황제는 소전의 아들이며 성이 희씨이다. 어머니는 부보이며 ... ... ... 유웅국을 이어받았고 헌원의 언덕에서 살았으니 헌원이라 하였다. 보정(宝鼎)을 얻어 봉선(封禅)을 성행시켰다.

<공자가어·편물>: 황제는 구름으로 관직을 명명하였는데 이때문에 관리들의 이름을 구름으로 지었다. 염제(炎帝)가 불로 공공(共工)이 물로 태호(大昊)가 룡으로 명명한것과 같은것이다.

<운급칠첨·헌원본기>: 황제는 구름의 상서로움을 지녔으므로 구름으로 관직을 기록하였으며 관리들을 구름으로 이름지었다. ... ... ... 그리하여 관리를 임명하고 구름으로 이름 지었는데 봄을 관리하는 관직은 청운관, 여름을 관리하는 관직은 진운관, 가을을 관리하는 관직은 백운관, 겨울을 관리하는 관직은 흑운관이라 하였다. 또 구름신을 섬겼다.

<사기·오제본기>: 황제는 소전의 아들이고 성은 공손이며 이름은 헌원이다. ... ... ... 헌원의 시기에 신농씨가 쇠락하여 제후들이 서로 싸우고 있어 백성들이 고통받고 있었지만 신농씨는 평정할수 없었다. 그리하여 헌원씨가 방패와 창으로 무장하여 조공하지 않은 자를 정벌하니 제후들이 모두 와서 복종하였다. 하지만 치우가 제일 난폭하여 정벌하지 못하였다. 염제가 주변의 제후들을 침범하려하자 제후들이 다 헌원한테 귀속하였다. 헌원은 병사들을 정돈하고 수련하고 만민을 위로하며 사방을 헤아린후 곰, 비, 비휴, 추호 등을 교련하여 염제와 판천(阪泉)의 들에서 싸우니 세번 교전후 승리하여 그를 취할수 있었다.

<헌원황제전>: 황제가 천하를 다스리며 중앙의 색으로 호를 시작하였다. 초기에 유웅의 나라에 거주하였기에 유웅제(有熊帝)라고 불렀다. 전쟁을 하지 않았다. 제 8대 신농씨인 유망(榆罔)에 이르러 제후들이 서로 싸우고 황제가 중심임을 칭하니 사방이 역시 주제넘게 각 지방의 색으로 칭하였다. ... ... ... 황제는 수양산(首阳山)의 위치를 물어 수양산의 금속을 캐여 칼을 제련하고 쇠뇌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동명기>: 황제가 수산(首山)의 동을 캐여 처음으로 칼을 제련하기 시작하였다.

<괄지지>: 판천, 현재는 황제천으로 불리는데 규주 회융현(현재 허베이성 줘루현 서남쪽) 동쪽 오십육리에 있다. 오리쯤 흘러나와 탁록(涿鹿) 동북에 이르러 탁수(涿水)와 합한다.

<헌원황제전>: 황제가 천하를 평정하니 모든 상서로움이 도래하여 태산(泰山)에 올라 하늘에 제를 올리고 정정산(亭亭山)에서 산천에 제를 지내였다. 또 환산(丸山)에서도 산천에 제를 지내였다.

◉황제가 태여난 곳

1. 천수(天水)설(감숙성 천수시). <수경주·위수>에: "황제는 천수에서 태여났다. 상규성(上邽城) 동쪽 칠십리에 헌원의 골짜기가 있다."라고 하였다. (대응인물-헌원씨, 혹은 복희씨 등 기타 제왕)

2. 제원(济源)설(하남성 제원시). 희수는 심수(沁水, 옛 지수<济水>의 상류 )이다. (대응인물-헌원씨)

3. 신정(新郑)설(하남성 신정시). 신정은 고대에 "유웅" 혹은 "헌원의 언덕"으로 불렸다. 이천오백년전, 춘추시기 사상가, 정치가인 자산(子产)이 백성들을 거느리고 신정에 있는 구자산(具茨山)에 올라 황제의 제를 올린 적 있다. 명나라 때 육응양이 <광여기>에: " 헌원의 언덕 신정은 옛날 유웅씨의 나라이다. 황제가 여기에서 태여나 그렇게 이름 지었다." 청나라 때 곽원항도 <역대제도고>에서 "황제가 수구(寿丘)에서 태여났다."고 언급했지만 그 곳이 산둥의 곡부가 아니라 허난의 신정이라고 하였다. <청일통지>에도"헌원언덕은 개봉부 신정에 있다."라고 하였다. 희수(姬水)는 허난성 정저우시 신정시 이수(潩[yì]水)를 말한다. (대응인물-유웅씨, 황제)

4. 수구(寿丘)설(산동성 곡부시<曲阜市>). <제왕세기>에: "황제는 수구에서 태여나 희수에서 자랐으므로 성을 "희"씨로 하였다." 당나라 장수절(张守节)은 <사기정의>에: "수구는 로(鲁)동문의 북쪽에 있으며 지금의 연주(兖州) 곡부현(曲阜县) 동북쪽 육리에 있다." 라고 하였는데 여기에 근거하면 황제는 지금의 산둥성 취푸에서 태여났고 희수는 사수(泗水)이다. (대응인물-금천씨)

[f-고-황제 출생지]

◉황제의 강역

동쪽으로 바다에 닿았고 환산(丸山)과 태산(泰山)에 오른다. 서쪽으로 공동(空桐)에 미치며 계두(鸡头, 육반산<六盘山>으로 녕하회족자치구 고원시<固原市>)에 오른다. 남쪽으로 강에 이르며 웅(熊,웅이산<熊耳山>으로 하남성 서북부에 있다.), 상(湘, 상산<湘山>으로 호남성 악양시 동정호 가운데 있다.)에 오른다. 북으로 훈육(荤粥)을 쫓아내고 부산(釜山, 하북성 보정시 서수현<徐水县>)에서 합부(合符)하고 탁록(涿鹿)의 산자락에 도읍을 정하였다. 자주 옮기였는데 사병들이 호위하였고 관직명은 모두 구름으로 하였으며 구름신을 섬겼다.

◉황제릉

1.주정원. <문향현지>: 황제릉은 현의 남쪽 주정원(铸鼎塬, 하남성 삼문협시 영보시 양평진<阳平镇>)위에 있다." 릉은 높이가 6미터, 둘레가 42.5미터로 단단히 다져진 황토로 세워졌다. 묘의 남쪽은 주정원이고 남쪽을 8키로 떨어진 곳은 형산(荆山)이다.

2.수구. <명일통지>: 헌원릉은 곡부현 동북 2리(산동성 제녕시 곡부시)에 있다. <제왕세기>: "황제는 수구에서 태여났다." 라고 적혀있다.

3.평곡. <기보지>: 헌원릉은 평곡(平谷)현 동북 십오리의 어자산(베이징시 평곡현 동북쪽)에 있다. 이 유적의 년대는 전국시기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최초로 황제의 제를 올리는 곳 중의 하나다.

4. 교산. 교릉(황제릉, 옛날에 교릉<桥陵>으로 불렸다.)은 연안부 중부현(섬서성 연안시 황릉현 교산진<桥山镇>)에 있다. 역대로 제왕들이 황제의 제를 올리는 곳이다. 기원전 422년 진령공(秦灵公)이 제를 올리였다. 릉앞에는 황제가 손수 심었다는 5천여년 된 측백나무가 있다.

[f-구-황제릉]

◉옥(玉)유적과 용(龙)유적

황제 시기에는 옥으로 병사를 무장하였고 용장하였다.

최초로 옥석이 출토 된 곳은 자산유적(磁山遗址, 기원전 8300년경, 하북성 한단시<邯郸市>)이다. 최초의 닭뼈도 여기에서 발굴되였다. 최초로 옥기가 출토 된 곳은 흥륭와문화유적(兴隆洼, 기원전 6000년경, 요하유역)이며 옥석가공이 최고봉에 올랐던 곳은 홍산문화유적(红山文化遗址, 기원전 3500년경)이다.

최초로 발견된 용의 유적은 부신찰해유적(阜新查海遗址, 기원전 6000년경, 요서, 내몽골 동부)의 돌무더기 용이다. 서수파유적(기원전 4500년경, 하남성 복양시<濮阳市>)에서도 조가비무더기 용이 발견되였다. 이곳은 전욱(颛顼)의 고향으로 알려진 곳이다.

[f-규-옥룡유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