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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조선-대하, 숙신/하후씨-우

하후씨(夏后氏) 우(禹)

by 성수록 2024. 3. 24.

◉ 우(禹), 하후씨(夏后氏)

우는 성이 사(姒)씨이고 이름은 문명(文命)이다. 하후씨(夏后氏)라고도 하며 하(夏)나라의 개국왕이다. 치수로 유명하고 역사상에서는 대우(大禹)라고 부른다. 아버지는 곤(鲧)이고 어머니는 유신씨(有莘氏)의 여자 수기(修己)이다. 우의 릉은 절강성 소흥시 월성구 우릉향 우릉촌(禹陵村)에 있다.

전하는데 의하면 우가 홍수를 다스리는데 공이 있어 제 순의 선양을 받아 부락의 수령으로 되였다. 양성(阳城, 산서성 진성시 양성현)에 도읍을 세웠는데 (또는 평양<平阳, 1. 안읍安邑,산서성 운성시 하현夏县. 2.진양晋阳, 산서성 태원시 진원구晋源区>에 도읍하였다고 한다. )국호를 하(夏)라고 하였다.

요의 아들 단주(丹朱)를 당국(唐国, 산서성 임분시 홍동현<洪洞县>)에 봉하고 순의 아들 상균(商均)을 우국(虞国, 하남성 상구시 우성현<虞城县>)에 봉하였다.

우가 죽은 후 회계산(会稽山, 절강성 소흥시)에 묻었는데 우의 묘당, 우의 릉묘, 우의 사당이 아직도 존재한다.

<맹자·만장상>: "우는 순의 아들을 피해 양성으로 갔다."

<고본죽서기년>: "우는 양성에 거주하였다."

<세본·거편>: "하우(夏禹)는 도읍을 양성에 하였는데 상균을 피해서이다. 또 평양으로 옮기였는데 안읍이거나 진양이다."

<사기·하본기>: "우는 핑계를 대고 순의 아들 상균을 피해 양성으로 갔다."

출생지에 대해선 쟁논이 있는데 하나는 문산 석뉴(石纽, 사천성 면양시 북천 강족자치현 석뉴촌)이고 다른 하나는 석요(石坳, 강서성 구강시 수수현<修水县>)이다. 어머니는 유신씨(有辛氏)의 여자 여지(女志, 또는 수기)이다. 우는 어린시절 아버지 곤을 따라 중원(中原)에 왔다. 아버지 곤은 제 요(尧)에 의해 숭(崇, 하남성 락양시 숭현<嵩县>)에 봉하여졌다. 그 때에 중원은 홍수가 범람하던 시기였고 곤은 명령을 받아 홍수를 다스리였는데 구년동안 끝내 홍수를 수습하지 못하였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우가 사공으로 되여 계속 홍수를 다스리게 되였는데 세번 집앞을 지나면서 끝내 들어가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 치수

하나라의 건국년대를 대략 기원전 2224년 전후로 추측할수 있는데 기후변화도를 참고하면 빙하기가 지난 이후의 두번째 온난기에 속한다. 바로 홍수기에 접어들었다고 볼수 있는데 우의 아버지 곤 시기는 가능하게 홍수의 고봉기였고 우에 이르러 홍수기가 드디여 끝난듯하다.

◉ 하(夏)나라

사서중에 기록 된 최초의 세습 국가이다. 기록에 의하면 14대, 17후(后, 하나라 통치자가 재위 기간에는 "후"라 부르고 죽은 후에 "제<帝>"라 불렀다 한다.) 471년간 통치하였는데 상나라에 의해 멸망하였다. 역사 기록에 따르면 우가 익(益)에게 왕위를 물려줄려 하였는데 익이 우의 아들 계(启)에게 양보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세습 왕조가 시작되였다. 영토는 서쪽으로 하남성 서부, 산서성 남부까지, 동쪽으로 하남성, 산동성, 하북성이 인접한 곳까지, 남쪽으로 호북성 북부까지 북쪽으로 하북성 남부까지였다.

<대대례기·소간편>: "상탕(商汤)이 하나라를 멸망시킨후 그 후예들을 기(杞,杞县)의 땅에 제후로 봉하였다."

◉ 기(杞)나라

상나라때에 시작되여 전국초기까지 존재했던 제후국이다. 왕의 성은 사(姒)씨이고 우의 후손이다. 상탕이 하나라를 멸망시킨후 하나라의 후손들을 기에 봉하였는데 존속과 멸망을 반복하였다. 주나라 초에 다시 기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는데 기원전 445년까지 유지되다 초(楚)나라에 의해 멸망하였다.

[l-먀-우릉,단주,상균]

<사기·진기세가>에 진(陳)과 기(杞) 두 나라의 역사를 다루었는데 기나라에 대한 서술은 고작 이백칠십여자밖에 되지 않으며 특별히 "기나라는 미미하여 진술할만한것이 없다."고 적었다.

기나라는 작지만 여전히 하왕실의 예를 보존하고 있었다. 하여 공자가 하나라의 예을 알아보려고 기나라에 갔지만 문헌 같은것이 다 소실되고 없었다. 이에 공자가 탄식하며: "하의 예를 말할수 없는것은 기나라가 보여준것이 없어서이다."라고 하였다.

 

이 외에 <열자·천서>의 "기나라 사람이 하늘이 무너질까 근심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 하(夏)나라의 실존여부

은허(殷墟)에서 나온 상나라 때의 갑골문과 청동기에 하나라에 관련된 기록이 전혀 존재하지 않으며 갑골문에 상탕(商汤)의 수많은 공적들을 기록하였는데 여기에도 하나라를 멸망시킨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동이(东夷)를 토벌한 기록은 있다.

또 상나라의 문자에 "하(夏)"자가 없었다. 상나라 때에는 계절을 "춘"과 "추"로만 나누었고 "하"와 "동"은 없었다. "하'자는 서주 말이나 또는 춘추 초기에 출현한것이다. 때문에 존재하지도 않는 글자로 나라의 이름을 하였다는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사기>에 왕해(王亥)를 하나라 소강(少康)의 신하로 기록하였지만 사실상 왕해의 "왕"은 바로 "국왕"이라는 뜻으로 하나라를 멸망시키고 상나라를 세웠다는 상탕의 훨씬 이전부터 상나라는 자신의 왕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하나라 시기에 대응하는 유적에서 청동기 등은 한 점도 발굴되지 않았고 명확히 신석기말기 부락형태의 유적이였으며 사마천이 기록한 고도로 발전하고 조직화 된 국가형태는 찾아볼수 없었다. 또 신석기 유적에서 바로 상나라 유적으로 넘어왔고 그 사이를 연결해줘야 되는 하나라의 유적은 흔적도 찾을수가 없었다.

그리고 주나라에서 언급한 하(夏)도 그 어떤 강대한 독립적인 국가가 아니라 주나라가 상나라를 멸망시킨것에 대한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내세운 과장된 존재였을수도 있다.

진시황의 분서갱유(焚书坑儒)에 의해 당시에 존재했던 사서들은 사실상 다 타서 사라지고 나중에 서한 때에 이르러 갖은 방법을 들여 다시 복원을 시도하는데 관가에서 내려주는 금전적 보상을 노린 위조된 가짜 사서들도 수두룩하였다. 때문에 한나라때에 만들어진 진나라 이전의 기록들에 대한 제일 큰 문제는 그것의 진실성 여부다. 이것은 사마천(司马迁)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그가 편찬한 <사기>도 이 문제를 피할수 없었을것이다.

황제로부터 요, 순, 우까지의 계보에 대한 옛 문헌들의 기록.

황제┬청양─교극─제곡─당요(唐尧)

       └창의┬한류─전욱─궁선─경강─구망─교우─고수─우순(虞舜)

                 └실명─실명─락명─백곤─하우(夏禹)

◉ 글자 "하(夏)"에 대해

"하夏"자는 xia, jia 로 발음하며 최초로 나타난것은 갑골문에서이다. 글자의 기본형상은 위엄있는 당시의 중원 일대의 사람모습이다. 동한시기의 <설문해자>에는: "중국의 사람이다."라고 적었는데 여기서 중국(中国)은 "하"자가 최초로 사용 된 당시의 중원에 있던 나라를 말하는것이다. 나중에 이 글자를 빌려서 사계절중의 여름을 나타내는 "하"자로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