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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작/예맥, 탁리, 고려

예맥(濊貊), 탁리(橐离), 고려(高丽)

by 성수록 2024. 3. 25.

◉ 예맥(濊貊), 탁리(橐离), 고려(高丽)

은상 때에 맥(貊, 동이<东夷>중 퉁구스 혈통이 제일 짙은 한갈래)은 산동반도 일대에 거주하고 있었다. 상나라가 멸망한후 주나라와 주나라 봉국들에 밀려 대부분 맥인들은 동북쪽으로 이주하게 된다. 이주하는 과정에 동, 서 두갈래로 나뉘는데 동쪽으로 이동한 이들은 지급의 하북성 동북부, 베이징시 방산구(房山区) 남부, 산서성 대현(代县) 동부, 발해의 서안의 땅에 들어가고 서쪽으로 이동한 이들은 지금의 산서성 북부와 섬서성 북부의 땅에 들어가 거주하게 되는데 후에 융적(戎狄)과 진(晋)나라에 밀려 다시 하북성 중남부로 돌아오게 된다.

기원전 4세기 중엽에 조(赵, 한단<邯郸>), 연(燕, 베이징) 두나라가 강성해지면서 하북성에 거주하던 맥인들 대부분이 동북쪽으로 다시 이주하여 요하 유역과 길림성 서북부까지 들어오게 된다. 이들이 동북에 거주하면서 초기에 발(发), 탁리(橐离)등으로 나뉘여 불리였다.

발은 지금의 휘발하(辉发河, 통화시 매하구시<梅河口市>) 유역에 흩어져 살았다.

탁리는 지금의 넌강嫩江), 송화강(松花江)의 합수목의 북부 평원(송원시<松原市> 북쪽)에서 살았는데 동북으로 이주한 예맥중 제일 북쪽에 자리잡은 한갈래였다.

 

맥인들은 예인(秽人)인 고이(高夷, 압록강과 장백산 일대. 고대 고양<高阳>, 고신<高辛>씨 후손들로 추측)들의 남서쪽, 량이(良夷, 조선반도<한반도> 중부)들의 북쪽에 위치하였는데 그 영역은 서쪽에서 지금의 의무려산(医巫闾山), 동쪽으로 청천강(清川江), 남쪽으로 바다에 잇닿았는데 이들과 고이, 량이 등 예인들을 통칭하여 예맥인이라고 한다.

탁리국(橐离国)은 또 색리국(索离国), 고리국(藁离国), 고리국(槁离国) 등으로도 불리였다.

<요사>: "한주(韩州, 길림성 사평시 이수현<梨树县>)는 본래 탁리국이 다스리였다." "봉주(凤州, 길림성 사평시 공주령시 모성자진<毛城子镇>)는 탁리국 옛 땅이다." "신주(信州, 요녕성 철령시 창도현<昌图县> 팔면성진<八面城镇>) 도 탁리국 땅이였다."

<발해국지>: "탁리국 도읍이 창도에 있다."

<료사>: "고려는 부여에서 나오고 부여는 색리(索离)에서 나왔는데 색(索)과 탁(橐)은 발음이 비슷하다."

<속수창도현지>: "탁리성은 현의 정북쪽 평안보(平安堡, 요녕성 철령시 창도현 평안보진<平安堡镇>)에 있는데 거기에 성이 하나 있고 본지인은 그것을 탁리성이라고 부른다. 누가 언제 세웠는지 알수가 없다."

[q-갸-예맥, 탁리]

전국(战国, 기원전476년~기원전 221년) 이후 예맥 중에 선후로 부여(夫余), 고구려(高句骊)가 출현한다. 기원전 37년 주몽이 남쪽으로 내려와 나라를 세운후 세력과 영토를 확장하며 발, 탁리 등 맥인과 옥저 등 예인, 부여인 등을 합병하며 동시에 고조선인들과 요동에 있던 일부 한인(汉人)들도 받아들인다.

<수서·열전>: "고려는 부여에서 나왔다. 부여왕이 하백녀를 얻어 실내에 가두었는데 해빛이 따라다니며 비추어 임신하여 큰 알을 낳았다. 남자애가 껍질을 깨고나오니 주몽이라 불렀다. 부여의 신하들이 주몽은 사람의 아이가 아니니 죽이라고 간청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건장하고 사냥하면 얻은 동물이 많은 즉 또 죽이기를 청하였다. 그 어머니가 주몽한테 알리여 주몽이 부여를 버리고 동남쪽으로 도망가다가 큰 물을 만나니 깊어서 건널수가 없었다. 주몽이: "나는 하백의 외손자이고 해의 아들이다. 지금 난이 있어 병사들한테 쫓기고 있으니 어떻게 하면 건널수 있을고?" 하니 거북가 자라가 모여들어 다리를 만들어 주몽은 드디여 건너고 쫓아오던 기병들은 건너지 못하고 돌아갔다. 주몽이 나라를 세우고 고구려라 이름하였으며 고(高)를 성씨로 하였다. 주모이 죽자 여달(闾达, 유리왕)이 뒤를 이엇다. 그 손자 막래(莫来, 모본왕)에 이르러 군사를 일으켜 부여를 병탄하였다. 그 나라는 동서로 이천리 남북으로 천여리이다. 수도는 평양성(平壤城)이며 장안성(长安城)이라고도 한다. 동서로 육리인데 산을 따라 굽이졌고 남쪽은 패수(浿水)와 인접하였다. 또 국내성(国内城), 한성(汉城)을 따로 두었는데 그 나라에서는 삼경(三京)이라고 하였다. 신라와 서로 영토를 다투었는데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모두 가죽관을 썻는데 쓸 때에는 깃털을 꽂았다. 귀한자의 관은 자색비단으로 하였는데 금은으로 장식하였다. 옷은 팔소매가 넓은 저고리에 통이 넓은 바지를 입고 가죽띠를 둘렀고 노란 가죽신을 신었다. 부인들은 치마저고리에 단을 덧붙혔다. 병기는 중국과 비슷하였고 봄, 가을에 사냥하였는데 왕이 친히 참가하였다.